2. 문화의 생태적 균형과 무협소설의 운명 (文化生态平衡与武侠小说命运) (하)

in #wuxia4 years ago (edited)

문화의 생태적 균형과 무협소설의 운명 (文化生态平衡与武侠小说命运) (하)

#무협

김용소설논고 2

주제를 잠시 벗어나 내 스스로 겪은 일을 먼저 말해도 무방하리라.

1958년 3월, 마오쩌둥은 ****제8차 대표회의의 제2차 회의에서 “네 가지 해를 없앨 것을(除四害)” 주장했다. 요컨대 참새가 사람과 곡식을 다투면 1년 만에 얼마나 많은 식량을 먹어치울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운동을 벌여 매 사람마다 모두 참새 박멸 운동을 해댔다. 베이징에서는 3일을 연달아 참새를 쫓았다.

인민들은 일이라곤 하지 않고 밖에서 징을 치고 대야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참새가 날아다니다가 놀라서 감히 내려오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지쳐 죽었다. 아이들은 각지의 참새 둥지를 찾아 다녔다.

그 년도에 분명히 많은 참새를 죽였다. 그러나 곧 밭의 해충이 늘어나 농작물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본디 참새는 사람과 곡식을 다투는 것 외에도, 해충을 박멸하는 좋은 새였다.

이번 교훈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미련한 짓을 저질렀고, 자연계의 생태적 균형을 파괴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외에 “전국민 제강(全民炼钢)” 시기에는 나무를 마구 베고, 아무데나 저수지를 만들어서 결국 물을 모으지 못하는 등등, 실로 미련한 일을 적지 않게 했었다.

그렇지만 자연생태의 균형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게, 사회문화의 생태적 균형을 파괴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우리는 혁명 관념으로 모든 걸 대체하여 순수하고도 순수한 어떤 세계를 건설해내고 싶어했다.

사상개조는 물론, “무산계급을 흥하게 하고 자산 계급을 멸하자(兴无灭资)”는 이야기나, 각종 정치운동 등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이외의 각종 사상, 도덕, 관념을 소탕•소멸 시켰다.

이는 마치 자연계의 참새처럼 해롭다고 여겨지는 모든 걸 죽여서 청소하는 것과 같다.

50년대부터 우리는 무훈(武训)처럼 빌어먹어 학문을 쌓는 정신을 비판하고, 무협소설처럼 의를 주장하고 협을 행하는 사상을 비판했으며, 종교를 비판하고, 교육구국론과 실업구국론을 비판했다. 또한 량쑤밍(梁漱溟)의 “향촌본위문화건설론(乡村本位文化建设)”도 비판하고, 후펑(胡风)의 “어디에나 생활이 있으니”, “진실을 쓰자”는 종류의 문예관점도 비판하며, 펑여우란(冯友兰)의 “추상계승법”도, 마인추(马寅初)의 “사회통제론”도, 바런(巴人)의 인성론도 모조리 비판했다.

60년대 초에는 또 청렴한 관리(清官)를 비판하고, 양시엔쩐(杨献珍)의 “합이이일론(合二而一)”, 조우청(周谷城)의 “시대정신규합론(时代精神汇合论)”, 쑨예팡(孙冶方)의 이윤학설까지도 비판했다.

비판에 따르면 그들은 개량주의를 만들어 설파했으며, 혁명의 길에 반대했고, 심지어 인민을 “정신아편”으로 마취했다.

우리는 무장혁명이 승리한 후 그걸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는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본래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일지라도, 사회생활에 있어 혁명에 부합, 보조, 보충, 반증하지 않는 사물이나 사상은 철저하게 배격했다.

본의야 마르크스의 사상을 존숭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역사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없앴으니, 한 건 형이상학이었다. 역사유물론에도 위배되며, 변증법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마오쩌둥은 40년대 초에 일찍이 정확하게 말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예술창작의 현실주의를 포함할 수 있을 뿐 대체할 수는 없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물리과학의 원자론과 전자론을 포함할 수는 있지만 대체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12)

헌데 50~60년대 중국대륙에서는 점차 이런 정치운동과 사상비판이 일어나서, 마침 허무맹랑하게 소위 마르크스주의라는 말을 써 사회인문과학의 각종 학과를 대체하려했다.

그 결과, 사람을 가르쳐 선을 지향하려는 사상이 비웃음을 받고, 사랑을 제창하는 이론이 멸시당하고, 심리과학은 “사이비과학”으로 선언되어 파기되었으며, 문화 교육사업은 짓밟혔다. 또한 정의를 보고 용감하게 뛰어드는 정신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으며, “문혁”에 다다라, 전통문화의 우수한 도덕관념은 “네 가지 오래된 것(四旧)”으로 여겨져 소탕되었다.

신시기에 들어 폭도들이 활개 치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이들이 물에 떨어져도 백여 명이 그냥 지켜봤다는 것은, 그래서 이런 경악할 사례가 계속 반복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사회문화의 생태적 균형을 파괴한 데에 대한 일종의 징벌이다.

협의정신은 정의감에 기초한 일종의 사회적 접착제이다. 일단 이런 정신이 사라지고나면, 사람들은은 실로 흩어진 모래처럼 될 것이고, 악에 저항하는 사회적 기제는 마비될 것이며, 법 체제 또한 관철하기 어려워 질 것이다.

무협소설은 과연 혁명을 가로막고, 혁명세력과 양립하지 않는 것인가? 이 문제는 분석과 해명이 필요하다.

무협소설은 사실 단지 소설의 한 종류일 뿐이지, 어떤 고정된 사상경향은 아니다.

물론 일반적인 무협소설들은 대개 협을 행하고 의를 주장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작품들로 말하면 내용이 비교적 복잡한 게, 폭압하는 사람을 쫓아 양민을 도우려는 부분이 도드라질 때도 있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가 과장될 때도 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글쓴이의 사상 수준에 따라 정해진다.

《수호전》 전반부는 관리들이 핍박하자 민중이 일어나는 컷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자못 반항정신을 고취하여, 대대로 누차 금지되었다. 청말민초 시기에도 몇몇 무협소설들은 청나라에 반항하고 만주족을 몰아내기를 고취하였다. 당시로써는 신해혁명과 자못 짝이 잘 맞아, 혁명성이 상당히 강렬했다.

다만 <아녀영웅전(儿女英雄传)> 같은 소설은, 봉건사회의 도덕규범과 인생이상에 부합하였다. (여자주인공 십삽매(十三妹)는 진심으로 고명부인이 되고 싶어 한다.)

이는 당시 사회에 반역성이나 파괴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두루뭉술하게 무협소설이 혁명을 방해한다고 하는 말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무협소설이 모두 혁명을 추동한다고 보는 것도 정확한 게 아니다.

허나 다수에게 있어 무협소설의 가장 큰 영향은 정의감이다.

무협소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에 뜨거운 피가 차게 하니, 잔혹한 폭압자들을 증오하게 하고, 무고하게 학대 받는 백성을 동정하게 한다.

사람에게 협객의 구원을 기대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정신은 혁명과 통하는 데가 있다. 만약 한 사람의 내면에 정의감이 없다면, 영원히 냉혈동물이 될 것이며, 결코 혁명에 투신할 가망이 없다.

혁명가란 적어도 하층의 핍박받는 인민들을 동정해야하며, 정의감이 있고, 가슴에 뜨거운 피가 가득하며,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청춘의 노래(青春之歌)>의 저자 양모는 젊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무협소설은 온종일 나를 빠져들게 했다. 머릿속에는 부자의 재물을 뺏어 가난한 이에게 주어야 하며, 불공평한 일에 있어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찼다.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는 무술이나, 제비처럼 도는 무술을 연습하려 했었다.”

그리고 30년대 북평에 있을 때 “사민무술사(四民武术社)”의 단체에 참가하여, 스승을 따라 태극권, 팔괘장, 협행을 연습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1931년 그녀가 독신으로 집을 나온 것은 혁명에 투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당시 무협소설은 “크게 관련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노인과 가난한 사람을 가엽게 여기고, 폭압자를 없애 백성을 구하는 동기, 그리고 재앙에서 백성을 구하자고자 하는 혁명사상이 원래부터 들어맞지 않았겠는가.”

<광명일보(光明日报)> 1995년 3월 24일 제6판에 보도된 “노혁명가” 양모의 이 설법은, 무협소설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최소한 혁명과는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대신 어떠한 내적인 일치성이 있음을 믿게 한다.

중국의 신문학가들 중 협문화와 관련 된 것은 비단 양모만이 아니다.

“나는 내 피로써 헌원을 존숭한다(我以我血荐轩辕)”했던 루쉰은 또한 무협에 조예가 있었다.

그는 10여 세이 이미 <검협전도(剑侠传图)>와 의사들의 복수가 가득 담긴 한나라 시기 야사 <오월춘추(吴越春秋)>, <월절서(越绝书)> 등의 서적에 접촉했다.(13)

젊은 시절에는 스스로 호를 짓기를 “알검생(戛剑生)”이라 하였는데, 다소 의협심 있는 일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는 고향에서 조상 중 협기가 있는 인물에게 큰 주의를 기울였다. 일찍이 <회계군 고서잡집(회계군 고서잡집)>을 한 권 편집한 적이 있는데, 치우진(秋瑾) 같이 의협정신이 풍부한 열사에 대해 유난히 탄복하였다.

<중국지질약론(中国地质略论)>에서 루쉰은 정면으로 ‘호협지사(豪侠之士)’를 긍정하고는, 그들을 애국자로 여기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호협지사를 알게 되면, 필히 슬피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고, 소매를 떨쳐 일어나게 된다.”

루쉰이 1926년에 쓴 <주검(铸剑)>은 한 편의 현대무협소설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인 묵색인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폭군에게 복수하는 협객이며, 게다가 그 이름은 “연지오자(宴之敖者)”이다. 루쉰 스스로가 과거에 썼던 필명으로, 작가가 그 인물에 대해 가진 애정을 확인하기 넉넉하다.

묵가는 줄곧 다음과 같이 일렀다. “근생박사하여 천하의 급한 일을 구한다(勤生薄死以赴天下之急)”

게다가 세칭 협의(侠义)는 (쑨이랑 <묵학전수고(墨学传授考)>), 루쉰 또한 긍정한 “묵자 무리의 협”이다.

30년대에 이르러 그는 <이수(理水)>와 <비공(非攻)> 두 편의 소설을 썼는데 우와 묵자를 칭송한 것이다. 그곳에서 두 인물은 민중을 보호하여 고통을 덜어주려 하고, 머리를 박고 일에 몰두하며,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묵협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장자 천하편(庄子·天下篇)>에 따라 묵자의 사상이 우에 기원한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협이 관방의 핍박과 유혹 아래 변질되거나 부패하는 현상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무뢰한의 변천>이라는 글에서 루쉰이 논술하고 폭로한 것은 그와 같다.

어떤 이는 그 글에 근거하며 루쉰이 협사를 무뢰한으로 봤으며, 협문화를 완전히 부정했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기도 하는데(14), 이는 일종의 엄청난 오해이자 곡해이다.

또한 라오서(老舍)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전통곡예와 소설작품에서 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였다. 그의 소설은 비록 유머러스하지만, 행간에는 “의”가 베여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웃고 울게 한다.

그는 <나는 어떻게 단편 소설을 쓰는가(我怎样写短篇小说)>에서 <단혼창(断魂枪)>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소설은 내가 쓰려던 ‘두 권법가’ 중의 한 단편이다. ‘두 권법가’는 —만약 쓸 수 있다면— 무협소설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걸 쓰려 했었지만, 어떤 걸 써낼지 주가 알겠는가?”(15)

무협소설은 결국 쓰이지 않았지만, <단혼창>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구슬픈 기운은 여전히 실로 감동적이다.

라오서의 장편소설에는 일찍이 이 두 협객의 그림자가 뛰놀았다. <노장의 철학(老张的哲学)>의 쑨쇼우베이(孙守备)와 <조자왈(赵子曰)>의 리징순(李景纯), <이혼(离婚)>의 정씨 아저씨(丁二爷), <우천사전(牛天赐传)>의 후 할아범(虎爷), 왕위자이(王宝斋), 심지어 <묘성기(猫城记)>의 용감하고 헌신적인 매까지.

그들은 위기의 고비에 정의를 위해 일하고, 가난하고 위급한 이들을 구하며, 독특한 작용을 한다.

1947년, 라오서는 미국 뉴욕에서 3막 4장의 활극 <오호단혼창(五虎断魂枪)>을 썼다. 이 중 왕다성(王大成), 송민량(宋民良)을 대표적인 호협지기로 찬미했었다.

라오서 소설은 결코 저렴한 “혁명문학”이 아니지만, 책의 그러한 늠름한 기운과 협의정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시대의 많은 독자들을 격려해 혁명의 길에 들어서도록 격려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도 있었다. 신상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몇몇 작가들에게도, 의협정신은 한 줄기 빛이 되곤 했다.

이 빛은 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영혼에까지 비쳐 들어왔다.

예를 들어 타이징농(台静农)은 어렸을 때 미명사(未名社)의 구성원으로, 루쉰과 친분이 깊었다.

타이징농은 <땅의 아들(地之子)>과 <탑을 쌓는 자(建塔者)> 두 편의 단편소설집을 내었는데, 전자는 탁월한 향토소설이고, 후자는 저자의 사상이 진일보하여 혁명가의 풍채를 완성시키는 광경을 보여준다. 어째서 이러한가?

이는 그리 확실한 건 아니다. 다만 이후 예지아잉(叶嘉莹) 교수가 쓴 <타이징농 선생 시고(台静农先生诗稿)>의 서언을 읽어보니, 타이징농이 대일 항전 시기 일찍이 썼었던 격양된 구체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호사(沪事: 상하이 사변)> “他年倘续荆高传,不使渊明笑剑疏”

<니중행(泥中行: 진흙 속을 가다)> “何如怒马黄尘外,月落风高霜满鞴”

<누가 보내는가(谁使)> “要拼玉碎争全局,淝水功收属上游”

그가 청년시기부터 보국의 웅대한 뜻으로, 형가(荆轲)와 고점거(高渐离)에 큰 영향을 받았던 엘리트임을 알 수 있다.

20년대 말 백색테러 유행했던 때 그의 사상 상태와 쉬쇼우샹(许寿裳) 암살 후 50~60년대 대만 시절 당시 그의 기나긴 침묵을 돌아보며, 무언가를 돌연 깨달을 수 있었다.

타이징농의 일생은, 의심할 바 없이 거듭 증명되었다. 의협심은 확실히 혁명과 통한다!

이런 몇 예를 보았을 때 족히 말할 수 있다. 무협소설과 신문학, 더 나아가서 혁명이 분명히 대립한다고 보는 견해는, 근거가 희박하다.

무협소설에는 이런 죄명도 있다.

사상적 방어능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중독작용”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가출을 종용하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게 한다는 말도 있다. 이런 결과는 분명 가능하긴 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40년대 기록에 의하면, 확실히 일찍부터 소년들이 아미산에 올라가 섬을 배우려 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어 있다.

허나 그렇다고 이런 문제가 무협소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 혁명문예를 읽을 때에도 일찍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예를 들어 항일소설 <철도유격대(铁道游击队)>를 읽고 기차에서 뛰어내린 아이가 있었다.

그 외에 항일 영화 <졸병 장가(小兵张嘎)>를 보고 어딜 가든 작은 칼로 자전거 타이어를 찌르는 아이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작품 자체의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학부모와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도에 의지해 해결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부정적인 작용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다.

눈앞의 살아있는 선례가 바로 탕이제(汤一介) 교수의 일이다.

어떤 학우가 내게 알려주기를, 탕이제 교수는 젊었을 때 유우궈은(游国恩), 쉬관잉(余冠英) 같은 아이들과 함께, 무협소설을 읽다가 푹 빠져 남몰래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고, 가족들이 그를 찾고서야 겨우 돌아왔다.

이후 나는 탕씨네 부인 러다이윈(乐黛云) 여사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는데, 그녀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탕 교수가는 확실히 무협소설 읽기를 좋아했다.

헌데 1943년 집을 떠나, 쿤밍에서 옌안으로 가려했는데, 마침 구이양(贵阳)에 이르러 바로 잡혔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의 정치적 혐의를 지우기 위해, 무협소설을 읽고 팬이 돼서 그렇다고 덮었었다.

나는 문득 크게 깨닫는 와중에 홍콩 라오종이(饶宗颐) 교수가 한 비슷한 회고가 떠올랐다.

그는 인터뷰 기자에게 말했다.

“나는 여섯 일곱 살 때 이미지가 무척 많고, 매우 활동적이었다. 무협신괴류 서적 읽기를 가장 좋아했는데, 특히 <봉신연의>를 좋아했다. 괴(怪)、력(力)、난(乱)、신(神) 이 네 글자에서 내가 특이 빨려들어 간 건 신(神)이라는 글자였다. 일곱 여덟 살 때 나는 거의 <봉신연의 후편>을 쓸 정도였다.”(16)

이를 보면 몇몇 무협신괴소설은 아이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키우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류의 소설을 만날 때, 아이들은 한 편으로는 성인의 지도가 필요하다. 자제력 결핍으로 인해 과하게 빠져드는 것을 막고, 이런 소설이 가질 수도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한도로 제한하기 위해서다.

허나 다른 한 편으로,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글 수는 없는 법이다. 응당 대담히 개방하여, 대담하게 아이들의 상상력과 분별력을 키워주고, 작품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어내야 한다.

양자 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상 우리는 협과 협문화가 사회문화의 생태적 균형을 맞추는 데 있어 무엇을 하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동시에 “좌익”에서 제기한 소위 무협소설의 두 가지 “죄명”에 대해서도 해명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무협소설이 전부 승인되어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정반대로 만약 역사적으로 분석을 진행해보면, 내 생각에는 구파무협소설은 예술의 질적 수준이 고르지 않고, 그 외에도 내용에 확실히 문제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칠협오의(七侠五义)>와 50회 분량 뒤의 <수호전(水浒传)>에는 노예사상이 등장한다.

적지 않은 무협소설이 복수에 너무 심취하여, 무고한사람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몇몇 작품에는 윤회전생이나 귀신의 힘 같은 미신적인 색채가 심하게 들어나기도 한다.

비록 무협소설 전체로 보자면 이런 문제들은 국지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협문화가 사회문화의 생태적 평형을 맞추는 데 있어서는 일종의 악영향을 준다.

그런 점에서 50년대에 홍콩에 출현하기 시작한 김용, 양우생을 대표로하는 신파무협소설은, 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홍콩은 반세기 동안이나 정치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요, 경제적으로는 자유로운 항만에서 점차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와 금융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오랜 기간 병존했고 상호침투 해왔는데, 전통문화와 5.4 신문화, 그리고 좌익급진문화가 한 자리에 공존하면서 페어플레이를 펼치는 진기한 풍경도 벌어졌다.

홍콩에서는 1949년 후 대륙의 정권이 실시한 여러 비판운동의 파급과 영향이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러 파괴적인 악영향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대륙 학술계와 문화계는 홍콩으로부터 새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각 민족이 일률적인 평등원칙 아래서 객관적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평가한다거나, 강희제와 건륭제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게 있다. 또한 명나라 중기 이후 자본주의 맹아가 태동했다는 문제에 대해 많은 진전이 있었다.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봉기와 청나라 시기 태평천국 운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졌으며, 문물고고학에 있어 일련의 매우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고적을 정리함에 있어 다소간의 성과가 있기도 하였다.)

중국은 홍콩학자와 문화인은 마땅히 중시하여 이로부터 큰 이익을 얻어내었다.

홍콩은 대만처럼 정치적 견해 때문에 대륙을 엄히 봉쇄하지 않았다. 이는 홍콩이 경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자유개방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비록 홍콩이 지속적인 상업화 조류에 부딪쳐, 문화적으로 상업화를 면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다지만, 전체적으로 말해 사회문화적 생태 자체는 정상이라 한 번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인 관여를 받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다. (1967년 대륙의 “문혁” 영향으로 인해 생긴 단기간의 특수상황은 제외한다.)

동서고금에 대해 홍콩의 학술문화계는 실로 루쉰이 제장했던 “자기의 눈으로 택하라”는 “취사선택”의 태도를 지녔다. 신파무협소설은 바로 이런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신파무협소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무협소설이라는 전통 장르에 새로운 내용을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김용과 양우생 모두 상당한 교육을 받았으며, 전통문화에 대해 애정이 깊고, 현대사상에 대한 지식을 구비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한 “협은 하층노동인민의 지혜와 덕의 화신이다.”라는 주장은, 협행을 정의, 존엄, 애민의 기초 위에 건립하였다.

이에 구파무협소설의 복수와 살인을 즐기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향을 버린 것이다.

그들이 쓴 것은 나라를 위하고 민중을 위하며, 독립된 개성을 가진 협사들이다. 결코 구파무협소설에 나오는 관부의 충복들이 아니다.

그들은 구파무협소설들의 황당한 내용을 고쳤고, 무공을 대체적으로 신보다는 사람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러면서 복잡하면서도 기이함을 헤아릴 수 없으니, 독자의 흥미를 감소시키기는커녕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줘 흥미를 배가시켰다.

과학이 발전한 20세기에 신파무협소설, 특히 김용의 소설이 수천만 독자를 포함하여 여러 과학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 현상은 실로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그 외 신파무협소설인 눈길을 끄는 것은, 깊고도 풍부하게 전통문화를 내용에 녹아냈기 때문이다.

전통소설의 언어를 쓴 것 뿐만 아니라, 중국전통문화에서 가장 특색있는 부분을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시•사•곡•부(诗词曲赋), 거문고•바둑•서예•그림(琴棋书画), 유교•도교•묵자•불교(儒道墨释), 의술•점복•별점•관상(医卜星相), 전설과 역사담(传说掌故), 고전문물, 민속정서 등등.

스토리의 전개, 무술 대결의 묘사, 인물성격의 서술, 작품주제 제시등을 불문하고 전통문화가 서로 융합하고 침투한다. 이를 유기적으로 조직했으니 실로 감탄할만한 것이다.

작가들은 신파무협소설을 매우 우수하게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중화민족과 해외화교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했다.

신파무협소설이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술적으로 과거의 것을 널리 참고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용감하게 시도했기 때문이다.

신파무협소설, 특히 김용의 무협소설은 서양근대문학과 5.4신문학의 예술경험을 끌어왔으며, 희극과 영화의 수법 및 기교도 빌려왔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여러 통속문학, 예를 들어 탐정소설이나 사회로맨스, 역사연의, 유며소설 등을 계승하여, 한데 융합한 것을 기초로 대단한 창작을 이루어냈다.

이는 구파무협소설은 따라갈 수 없는 성취로, 진정한 아속공상(雅俗共赏)을 이뤄냈다.

신파무협소설의 이러한 성취는 김용과 양우생 등의 작가가 엘리트문화로 무협소설을 개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조는 무협소설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왔으니, 20세기는 물론 21세기 범위까지 중화권 사회문화의 생태적 균형을 조절한 것이다.

신파무협소설, 특히 김용의 무협소설은 수억 독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펑무(冯牧), 종푸(宗璞), 예원링(叶文玲), 장다춘(张大春), 류짜이푸(刘再复), 리타(李陀) 등 수많은 신문학 작가들의 열렬한 찬사 또한 받았으니,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가 새로운 무협을 부르노니! 문화 생태계의 균형은 새로운 무협을 필요로 한다! 80년대 말부터 중국대륙은 또다시 온 국민이 정의의 정신을 부르짖노니, 실로 시기적절한 일이다!

진정한 의협심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주석

주석 (11)과 (14)는 <김용을 거부한다(拒绝金庸)>의 부분이다. 각주 (2)를 참조하라.

(12) <옌안 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在延安文艺座谈会上的讲话)>, <마오쩌둥 선집(毛泽东选集)> 1권 875페이지. 인민출판사 1996년 3월 제1판, 베이징.

(13) 루쉰은 1936년 3월 28일 마츠다 와타루(增田涉)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사신편(故事新编)>에 있는 <주검(铸剑)>은, 확실히 열심히 쓴 것이다. 허나 그 출처를 이미 잊어버렸다. 어릴 때 읽은 책에서 재료를 골랐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오월춘추(越春秋)>나 <월절서(越绝书)>에 있던 것 같다.” <오월춘추 · 합려내전 (吴越春秋·阖闾内传)>에 따르면, 보검조차도 정의를 말할 줄 알았다. “湛盧之劍惡闔閭之無道, 乃出而去,水行如楚”

1936년 3월 28일 치 증전섭신에서 「이야기 신편의 「주검」을 확실히 열심히 썼다.그런데 출처를 잊었는데, 어릴 때 읽은 책이라 오월춘추나 월절서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오월춘추(吳越春秋) 阖려내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보검(寶劍)조차 정의를 말할 줄 안다.

(15) 라오서는 <나는 어떻게 단편소설을 쓰는가(我怎样写短篇小说)>는 <노우포차(老牛破车)>에 수록되어 있다. <라오서 문집(老舍文集)> 제 15권 198페이지이다. 인민문학출판사에서 1990년 11월 출판되었다.

(16) 후샤오밍(胡晓明) <라오종이, 그 사람(饶宗颐其人)>에서 인용하였다. 베이징의 잡지<동방(东方)> 1995년 제 3기에 실려있다.

번역자: 무척 긴 원고인데, 문득 번역이 끝났습니다. 하루는 쉴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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