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화의 생태적 균형과 무협소설의 운명 (文化生态平衡与武侠小说命运) (상)

in #wuxia4 years ago (edited)

문화의 생태적 균형과 무협소설의 운명 (文化生态平衡与武侠小说命运) (상)

옌쟈탄(严家炎)

#무협

김용소설논고 2

이 주제는 좀 먼 곳부터 얘기해야 한다.

중국에서 소설은 오랫동안 “작은 도(小道)”로 여겨져 왔다.

게다가 무협소설은 일부 사람들 눈에는 대략 “작은 도” 중의 “작은 도”여서, 소설 중에서도 “출신 나쁜(出身不好)” 줄기였다.

청말에 이미 “무협의 모범을 남긴” <수호전>이 역사적으로 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에도, 이미 전세계 중국어 문학 중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인 김용이 큰 명예를 얻자, 여전히 어떤 이들은 그가 쓴 무협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문의 출신을 논하여 그 가문의 8대 조종을 찾아내고는, 협사(侠士) 나으리가 일찍이 “무력으로 법을 범했다(以武犯禁)”고 말했다.

게다가 소설 자체는 또 “정진적 아편(精神鸦片)”을 파는 것이라 하며, 사람들에게 단호히 “거절하라”고 경고했다.

(1994년 12월 2일 <남방주말(南方周末)>에 간행된 옌리샨(鄢烈山) 씨의 문장이다. 제목은 <김용을 거절하다(拒绝金庸)>이다.)

이 저자는 스스로 아직 김용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일이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는 저자가 “김용을 거절하라”고 부추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김용 작품을 읽지도 않고 “거절”을 표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저자가 가진 사유방식의 기묘함을 볼 수 있을 뿐이라, 김용 자체의 탁월함에는 손색이 가지 않는다.

실로 사람을 이리 놀라는 것은, 협문화(侠文化)를 2~3천년 봉건사회의 잔재가 심해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근 수십 년 간의 좌경사조가 가진 해악의 일례이다.

오랜 기간 봉건사회에서, 협과 협문과는 줄곧 봉건정통세력의 압제와 공격을 받아왔다.

대개 협사(侠士)가 가진 모종의 반역성 때문인지, 선진시대 법가 인물인 한비자는 이렇게 일렀다.
“유(儒)는 말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侠) 무력으로 법을 범한다.(儒以文乱法,侠以武犯禁)”

사실, 협객이 무력을 꼭 대동하는 것은 아니다.

묵자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막을 때 매우 큰 협행을 했으나, 무공을 쓰지는 않았다.

서한 시대에 이르면 “유(儒)”라는 한 글자만이 홀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협(侠)”은 항상 봉건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이해되었고, 그렇기에 무력으로 토벌되거나 탄압 당했다.

한 무제는 한 편으로 선비를 존중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수많은 대협을 죽이고는 심지어 그들의 온 집안을 몰수하고 참형에 처했다. 권력자는 정의를 수호하고 권위를 무시하는 자에게 분노하였다.

때문에 오늘날 누군가 “협이 무력으로 법을 범한다(侠以武犯禁)”고 꾸짖을 때, 그는 사실 봉건 통치자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현대에 협객문화를 연구한 전문가들 중에는, 진보적인 입장에 서서 유협(游侠)을 봉건질서의 파괴자로 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국인 중국계 학자 류뤄위(刘若愚)는 그의 저작 <중국의 협(中国之侠)>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기사는 봉건제도의 기둥이나, 중국의 협객(游侠)은 봉건사회의 파괴역량이다."(3)

이 말은 표면적으로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관 쪽과의 관계로 말하자면, 중국의 유협은 서양의 기사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조금 더 깊이 파고들자면, 유협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단편적이다. 그 이유는 봉건사회에서 협과 협문화가 이중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결코 단일한 작용이 아니다.

하층인민이 권력자에게 압박 받아 서글프나 호소할 곳이 없을 때, 협객이 출현한다. 이는 관부에 대항일 수도 있지만,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구원이라 위안일 뿐이라, 사태 자체가 터져 나가는 것을 막고 사회모순을 완화시킨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제 2의 충성”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협행은 일종의 사회 윤활제이다. 협행은 일정한 범위에서 폭력을 억제하여 화근을 없앤다. 이미 있는 사회문제가 계속 축적되지 않게 하여 폭발을 막고, 생산력이 안정적으로 발전되게 돕는다.

법가의 특징이 법치를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라면, 유가의 특징은 덕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역서 묵가의 유협으로 말하자면, 법치와 덕치가 통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처를 덮고, 사회에 통증치료제를 얹어주는 것이다.

이는 법가와 유가의 보충으로, 생태계의 균형을 잡아주는 작용을 한다.

엥겔스는 <블로흐에게(1890.9.21.~22)>라는 편지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보여주었다. :

“역사는 여러 힘이 모여 형성된 평행사변형이다. 여러 종류의 힘과 작용이 서로 억제되어, 결과적으로 균형을 유지한다.

법가가 추앙하는 법률, 유가가 추앙하는 윤리도덕, 도가가 추앙하는 청정무위와 물폐민(勿扰民)의 사상, 묵가가 추앙하는 겸애와 상무정신, 그리고 기타 교육구국, 종교구세 등등의 주장은, 각각마다 타당한 부분이 있다.

상반되는 부분도 있지만 상성하는 부분도 있으니, 모두 사회 생태와 문화 생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서로 제약하고 서로 보충하는 총체인 것이다.”

“위정자는 각 시기에 구체적신 상황에 따라 어떤 것에 편중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편들을 배척하여 치우칠 수는 없다. 치우치면 바로 생태적 균형을 잃는다. ”평행사변형“을 부순다면, 사회에 혼란이 오고 재앙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협과 협문화의 대체불가능한 작용을 이해하고, 비교적 청명한 두뇌를 유지하며, 유협의 파괴력에 대한 지나친 의구심을 지울 수 있다.

현재 사회가 어둡고, 권력이 핍박하며, 법 집행이 불공정하고, 악한 세력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를 때, 혹은 의외의 천재지변을 만나 구원이 필요할 때라면, 협과 협문화는 스스로의 진취적인 작용을 한다.

청말의 한 문화인은 <수호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핍박하는 이는 억압의 극치이다. 핍박하지 않았는데 도적질을 한다면, 그 죄는 아래에 있는 것이다. 핍박 때문에 도적질을 한다면, 그 죄는 위에 있는 것이다. 도적질은 핍박에서 난다. 그렇다면 강도도 의사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4)

협과 협문화의 창끝은 결코 사회 전체에 겨눠진 것이 아니다.

양산박의 대의거 또한 결코 송나라 강산을 목적으로한 게 아니니, 어찌 그저 외딴 협객이겠는가!

진정한 “봉건사회의 파괴역량”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는 탐관오리, 악질지주, 혼군과 간신, 그리고 기타 부패세력이다.

둘째는 농민봉기군이며.

셋째는 낙후된 봉건계급에 대한 이민족의 침입이다.

협객은 주로 첫 번째 파괴역량에 대한 교정자요 반항자다.

그들은 자기의 협행으로 정의를 드높이고, 폭력을 줄이며, 사람들의 재난 극복 정신을 분발시키며, 또한 사회 생산 질서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유지한다.

비록 법률 이외의 형식과 수단을 동원했지만, 많은 부분이 강요된 것으로, 이는 그들의 상대 자체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불법행위자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협과 협 문화를 단순히 '봉건사회의 파괴역량'으로만 보는 것은, 오랜 기간 형성된 일종의 오독이다.

이러한 편견과 오독은, “5.4”문학혁명 시기에야 시정될 수 있었다.

당시의 선구자들은 소설은 “한서(闲书)”나 “소도(小道)”에 불과하다는 천백 여년의 봉건적인 관념을 무너트렸다. 그리고는 소설을 문학의 첫머리에 세우는 크나큰 공적을 이루어냈다.

“사람의 문학”, “평민문학”, “사회문학”, “사실문학”의 기치 아래, 문학의 평가기준을 새로이 확립했으니, <홍루몽(红楼梦)>, <라오찬 여행기(老残游记)>, <관장현형기(官场现形记)> 등 그 동안 중시되지 않았던 소설들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위치로 끌어올려졌다.

그들이 “흑막소설(黑幕小说)”과 “남조소설(滥调小说)”에 대해 한 비판에도 정확하다 할 견해가 여럿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5.4시기 몇몇 선구자들은 문학문제에 있어 다소 유치하고 편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그들은 사실을 중시하고 상상은 경시했다. 과학을 중시하고 환상은 경시했다. 사상의 공리는 중시했지만 심미적 특질은 경시했다.

신화, 동화, 무협, 지괴류의 작품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유기(西游记)>, <봉신방(封神榜)>, <요재지이(聊斋志异)>를 모두 “비인간적” 문학으로 보았다.

그들은 <섭은랑(聂隐娘)>과 <홍선(红线)> 뿐만 아니라, <삼국연의(三国演义)>와 <수호전(水浒传)>의 줄거리 일부를 “미신적”이라고 비난하며 작품 전체를 거부했다.

이는 그들이 무협류 작품들을 비교적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평가할 수 없게 했다.

30년대 들어 좌경유치병은 더욱 더 심각하게 발전했다.

무협소설은 결국 붉은 줄(另册)이 그어졌다.

그 “죄명”은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였으니, “군중의 지각을 방해하고”, “혁명의 발전을 정해하는” 일종의 “반동의식형태”로까지 이어졌다.

때문에 마치 혁명이 일찍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환상을 만들어내는” 협문화에 있는 것만 같았다.

무협소설이 폭력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여 “무력으로 법을 범했다”고 보는 관점은 봉건 통치자의 입장에서 본 우파적 부정이며, 무협소설이 “환상을 조장하는” “정신적아편”이라는 주장은 혁명자의 입장에서 본 좌파적 부정이다.

취치우바이(瞿秋白)는 1932년 <문학월보(文学月报)> 제1호에 실린 <대중문예의 문제(大众文艺的问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청백리 나으리(青天大老爷)에 대한 숭배, 무협과 섬선에 대한 몽상”. “부지불식 간에 혁명의 계급의식 성장이 자라나는 것에 대해, 극히 완고한 저항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키호테의 시대(吉诃德的时代)>라는 글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인의 머릿속에는 검선이 통치하고 있다.” “무협을 믿는 이들은 서로 묻지도 않고, 서로 살피지도 않는다. 이들의 수는 실로 많아, 그 많기가 모래바람과 같다.

매 알마다 서로 멀리 분리되어, 한 접시에 흩어져 있는 수준이 아니라, 고비사막마냥 흩어져있다. 그들은 각자 영웅을 기다린다. 각자 앉아서, 두 손을 늘어트린 채 잠들고는.

왜인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비선검(飞仙剑)이 있으니, 그대는 안심하고 노비가 되라’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5)

신문학가 중 정전둬(郑振铎)는 <무협소설을 논하다(论武侠小说)>를(6), 마오둔(茅盾)은 <봉건적 소시민문예(封建的小市民文艺)>를(7) 썼다.

이들은 모두 취치우바이에 호응하여 무협소설을 혹독히 비판하고는 철저하게 부정해버렸다. 이는 당시로서는 어쩌면 그 나름대로 겨눈 바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결론이 아무래도 너무 간단했다. (이후 우리는 이에 대해 정면으로 논할 것이다.)

1949년 후, 이러한 “혁명적 견해”가 전국 정권의 힘을 빌러 실행에 부쳐지면서, 무협소설은 금지되거나 표면상 금지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

<인민일보>는 <반동적이고, 외설적이며, 허황된 도서, 단호히 처리하라(坚决地处理反动、淫秽、荒诞的图书)>라는 사설에서 명확하게 다음을 제시했다.

“음란한 생활을 조장하는 색정도서는 물론, 선을 찾고 도를 수련하며(寻仙修道), 검기를 날리거나 기를 운행하고(飞剑吐气), 채음보양(采阴补阳)은 물론, 종파의 은원을 따져 죽이는(宗派仇杀) 이런 황당무계한 무협소설은, 응당 환수해야한다.”

“이러한 반동적이며 음란하고 황당한 서적은, 사실 이미 제국주의와 장제스 도적 무리의 ‘제5부대(第五纵队)’의 공작으로 퍼지고 있다.”(8)

이후 30년에 걸쳐, 출판사는 무협소설을 내지 않았고, 도서관은 무협작품을 빌려주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이따금씩 오래된 무협서적이 타버린 것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무협소설작가들은 반복적으로 “죄”를 인정하는 반성문을 썼다.

심지어 “협을 행하고 의를 추구하니(行侠仗义)” “정의를 보고 용감히 뛰어들도다(见义勇为)” “형제들의 의기(哥儿们义气)” 등을 일상용어로 쓰는 것은 “계급분석이 결핍된 것”이었다.

게다가 책, 방송, 영화에서는 쉴 새 없이 지껄이며 비판을 해댔다. 이리도 큰 중국 대륙이, 실로 극락정토 같구나!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사람들이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읽은 신문에는 계속 이런 보도가 올라와 읽혔다.

: 백주대낮에 악당 한 명이 칼을 들고 돈과 수표를 내놓으라며 공공버스에서 승객 20~30여명을 겁박했는데, 아무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두 나쁜 놈이 장거리버스에서 여행객 수십명의 재물을 공공연히 약탈하고는, 당당하게 떠나갔다.

열차에서 폭도들이 감히 모든 여행자 칸에서 대놓고 금품을 약탈하고는 부녀자를 모욕했다. 허나 사람들은 끝내 못 본 척 했으며 감히 손도 내놓지 못했다.

어린 아이가 물에 빠졌고, 강기슭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백 명이 넘었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등등.

광저우 길거리에서, 광둥성 방송 청년기자 안커(安珂)는 도둑과 싸우다 상처를 입었다.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인민일보>의 기자 후스셩(胡思升)은 이렇게 보도했다.

광저우 창디대로의 번화가에서, 퇴근길의 북적거리는 러시아워 때, 사람들은 안커(安珂)를 둘러싸고 그가 길 한 복판에서 맨손으로 칼을 든 세 명의 악한들과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교통체증은 10분이나 넘었지만, 아무도 고함 쳐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결국 네 명의 악한은 칼을 휘두르고 성큼성큼 떠났다.

괴한들이 가방을 빼앗는 것을 목격한 안커(安珂)의 친구가 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보위간부였으나, 혈전이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다.

안커(安珂)는 피바다에 쓰러져 있었고, 누군가는 지나가는 트럭과 버스 두 대를 가로막아 병원으로 옮겨 구하려 했으나, 차의 기사는 끝내 영웅이 사경을 헤매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9)

우한의 한 음식점에서, 똑같이 방송기자인 양웨이(杨威) 현장에서 도둑을 잡았다.

그는 도둑에게 “빨리 지갑을 내놓으라!” 지시했다. 허나 도둑 맞은 사람이 그 지갑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도둑은 기세등등하게 양웨이에게 반격하며 말했다. “너는 멀쩡한 사람을 모함하는구나!” 그리고는 현장에서 양웨이를 구타했다. 도둑의 일당들 또한 와르르 몰려왔다.

구타당한 양웨이는 악당들과 싸우면서 “도둑놈 잡아라”소리쳤다. 하지만 식당 종업원과 손님 중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중에 공안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올 때, 양웨이는 이미 여러 군데 상한 뒤였다.(10)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신문에 보도된 이런 충격적인 일들은 대략 170여 건에 이른다. 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현상인가!

옌리에샨 선생에 따르면 : “무협소설은 근본적으로 아편과 같아, 사람을 흥분 속에서 나약하게 미끄러트린다.”고 했다. (11)

지금 독자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 이러한 “정신아편”이 금지된지 장장 30년이 지났고, 무협에 대한 비판은 장장 반세기에 이르렀다.

어찌하여 사람들의 “박약”한 근원이 철저히 뿌리 뽑히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용감해지지 않았는가? 이런 사례는 어찌하여 오히려 더 많이 발생 중인가?

이에 사회문화의 생태적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계속)

주석

(1) 1905년 출간된 <신소설(新小说)> 제15호 <소설총화(小说丛话)> 중 <수호전(水浒)>을 논하는 편을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수호전> 중국소설 중에서도 우수한 것으로, 무협(武侠)의 모범을 남겼으며, 사회로 하여금 그 혜택을 보게하였다. 실로 시내암(施耐庵)의 공적이다.“

옌리에샨(鄢烈山)의 <김용을 거부하라(拒绝金庸)>는 광저우의 <남방주말(南方周末)> 1994년 12월 2일 호에 실렸다.

“내 이지와 교양은 완고히 김용(과 양우생 및 고룡의 무리)을 거부하니, 본래부터 이에 주저함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신무협 소설을 읽기 좋아하는 몇몇 문우들은 내게 김용, 양우생의 소설을 극력 추천해왔다. 이에 나 또한 ‘지식이 부족함은 군자의 수치다(一物不知,君子所耻)’라고 여겨, <녹정기>와 <사조영웅전>을 빌려왔다. 허나 결국에는 아들의 심부름이나 한 번 했을 뿐이다.

나는 협이란 선천적으로 머리 거꾸로 달린 괴물로 여겨왔다. 때문에 어떤 문학천재가 아름다운 필치로 머리를 굴려 영웅이나 성인을 생생하게 그려내든, 나는 기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역사인식 차원에서 말하자면, 무협은 중국사회의 발전에 있어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가치 및 취향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무협의 무덕을 아무리 멋지게 묘사한다고 한들, 그것들의 ‘무로 금지된 것을 범한다(以武犯禁)’는 사회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루쉰이 《무뢰한의 변천(流氓的变迁)》에서, 무뢰한의 조상을 무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실로 일리가 있다. 무뢰한이란 본디 사회의 공중도덕과 사회 규범을 경멸하는 반사회적 분자들이며, 무협은 미신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의 무공을 믿고는, 사회적 질서나 운영 절차를 경멸한다. 법치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결코 계승해야 할 ‘우수한 전통 문화’가 아니다.”

“문화오락 차원에서 말하자면, 같은 심심풀이 물건이라도, 무협소설은 <설록홈즈 탐정집> 등의 탐정소설보다도 한 단계아래다. 탐정소설을 보는 것은 지혜를 일깨우는 게임이지만, 무협소설은, 근본적으로 아편과 같아 사람을 흥분 속에서 나약하게 미끄러트린다.”

(3) 리우루어위(刘若愚) : <중국의 협(中国之侠)> 중역본 193~194쪽, 상하이 산리엔(三联) 서점 1991년 출판, 저우칭린(周淸林), 탕파나오(唐發铙) 역

(4)작가 미상: <중국소설의 대가 시내암전(中国小说大家施耐庵传)>은 <중국근대문론선(中国近代文论选)>에 실려 있다. 인민문학출판사에서 1959년에 출판.

(5) 취치우바이(瞿秋白)의 <돈키호테의 시대(吉诃德的时代)>. 1932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난탄(乱弹)> 1938년 5월 호에 수록되어 상하이 노을사(霞社)에서 출판되었다. <취치우바이 문집(瞿秋白文集)> 제2권 273~274p에 인용되어있다. 인민출판사 1953년 10월 베이징 1판이다.

(6) 정전두어의 <무협소설을 논하다(论武侠小说)>. 신중국서국이 1932년 7월 출판한 <바다제비(海燕)> 편에 있다.

(7) 마오둔(茅盾)의 <봉건적 소시민문예(封建的小市民文艺)>는, 1933년 2월 1일자 <동방잡지(东方杂志)> 제30권 제3호에 실려 있다.

(8) <인민일보>의 사설 <반동적이고, 외설적이며, 허황된 도서, 단호히 처리하라(坚决地处理反动、淫秽、荒诞的图书)>는 1955년 7월 27일 <인민일보>에 수록되어있다. <20세기 중국소설이론 자료(二十世纪中国小说理论资料)> 제5권 (1949~1976) 125~26p, 북경대학출판사 1997년 2월 출판.

(9) 후스셩(胡思升)의 <진동과 숙고 — 안커(安珂)의 장렬한 희생 후 사회적 반향을 기록하다(震动和沉思——记安珂壮烈牺牲后的社会反响)>. 1982년 5월 7일자 <인민일보>에 실림.

(10) <인민일보> 기자 류헝(刘衡)과 공다(龚达)가 낸 <살아있는 안커(安珂) 악당과 싸우다 우한 산전(三镇)에서 전해온 미담(活着的安珂斗歹徒,武汉三镇传佳话)>. 1983년 4월 12일자 <인민일보>.

번역가: 양이 좀 길어서 두 부분으로 잘랐습니다. 조만간 (하) 올라갑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2890.35
ETH 2544.51
USDT 1.00
SBD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