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돈키호테의 시대(吉诃德的时代), 취츄바이(瞿秋白)

in #wuxia4 years ago

돈키호테의 시대(吉诃德的时代)
취츄바이(瞿秋白)

#무협

일반적으로 “교사(教师)”라는 개념은 매우 기나긴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다.

당나라 초기 사문박사를 지냈던 양사훈(楊士勳)은 <춘추곡량전소(春秋谷梁传疏)>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스승은 사람을 가르쳐내지 못하니, 그렇기에 가르치는 이를 두고 사자(師資)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師資)란, 선진 시기 이후 대대로 나온 교사에 대한 여러 별칭 중 하나이다.

<한비자>에서도 말하기를 “요즘 덜 떨어진 녀석들은…… 스승(師長)이 가르쳐도 변할 줄은 모른다.”

여기서 “사장(師長)”이란 당연히 교사를 가리킨다.

이 사자(師資)와 사장(师长)은 “교사(教师)” 개념의 초기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명실상부한 “교사”라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교사”란 전수하는 지식이 분명해야하고 스스로의 직책도 명확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와 신문잡지에는 고사성어와 명언경구 등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러나 학생들이 작문을 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문장들을 거의 활용하지 않으며, 게다가 쓴다하더라도 제대로 써내기 어렵다.

왜인가?

철저하게 “죽어라 외우지(记死)”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매일 3~5분 정도 시간을 써 성어 하나, 경구 하나씩 외우면 된다. 뒤쪽 칠판에 “축적 칼럼”을 매일 바꿔가며 쓰면 된다.

아니면 매일 수업 3분 전에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설명하는 것으로, 아니면 학생 개개인이 수집할 수도 있다. 매일 노트에 베껴 쓴다거나, 교사가 검사하는 일 등등도 있겠다.

이렇게 일 년에 300여개의 고사성어와 300여개의 명언경구를 외울 수 있다. 세월이 쌓이면 결국 적지 않은 자산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학생의 머릿속에 “저장”된 고전은, 자연히 말하는 대로 문장이 되게 하며, 글을 쓸 때는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게 하여, 문장을 더더욱 빛나게 한다.

“죽어라 외우는” 것은 전통적인 학습방식으로, 우리나라에 있어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소양교육이 진행됨에 따라 암기는 일종의 경직된 것이자, 학생의 능력발전에 방해되는 학습방식으로 여겨져, 점점 사람들에 의해 버려지게 되었다. 또 한 편으로 선생들은 학생들의 어문소양을 높이기 위해 실로 고심하였다.

사실 적절하게 응용하기만 한다면 “죽어라 외우는” 것 또한 학생의 자질을 성장시키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반대로 암기야말로 학생의 국어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전제이자 기초이다.

중국에는 글자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허나 우리는 통계치가 없다.

만약 중국에 식자가 1만 명 내지 2만 명이라고 한다면, 아마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 거릴 터다. 하지만 소위 신문학 —그리고 “5.4”식의 각종 신체 백화문 서적은, 최대로 팔려도 고작 2만에 불과하다. 예외는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나머지 “독자사회”에서는 무엇을 읽고 있단 말인가? 만약 이 2만 명의 작은 단체를 — 4만 명의 인파 가운데의 나머지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중국이 여전히 돈키호테의 시대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중국이, 유럽화된 “문학청년”과 관계없다는 것이다.

유럽 중세시대에는 서양 기사도문학이 넘쳐났다. 중국의 중세시기에도 국술 관련 무협소설이 넘쳐났었다.

중국인의 머릿속에서는 검선이 통치하고 있다. 스페인 중세 말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써, 서양기사도를 비웃었다.

동양의 세르반테스는 여전히 제 요람에 있는가? 아니면 아직 모태에도 없는가?

괜찮을 지도 모른다. 중국의 <수호전>은 귀중한 문학고전이다. 그러나 그것 하나 뿐일까 두렵다.

<수호전>을 모방한 건 거진 1만 부에 달하지만, 도대체 어느 부분을 모방해 간 것인가?

초야의 영웅은 결국 황제에 오르지도 않고, 기껏해야 부자를 약탈하고 가난한 이를 도왔을 뿐이다. 청백리를 몽상하는 청천백일(青天白日) 주의자들은, 심지어 이런 강도들을 청백리라고 부르며, 고난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관세음보살로 모신다.

(이하는 교과서에서 삭제된 부분)

우리는 또 “푸줏간을 지나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을 생각해낼 수 있다. 올해 들어 이 세상에 수많은 탐관오리와 악질지주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미워해야 할 대상을 또 새로이 추가했다.

욕심 많은 작업반장, 더러운 여자십장, 크고 작은 매국노, 국민당의 새 관리.

이 정도로 한을 품노라면, 당신 또한 그들의 눈에 담긴 흉광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의 긴장된 신경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이 빵을 먹을 때 유난히도 즐겁게 씹는 걸 볼 수 있을 터다.

그들은 “원수”의 심통을 씹는 것이니, 방금 그들의 머릿속에 있던 검선이 그들을 대신하여 파내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더러운 관리들, 새로운 방식을 탐욕을 무리는 무언가, 더러운 무언가를 미워하는 바에. 민중들은 무엇을 하려하며, 또 어찌할 계획인가?

그들을 믿는가? 무협을 믿는 그들은 각자 서로는 믿지 않고, 서로 살피지도 않는다.

그들의 수는 많고도 많아, 마치 사막의 모래 같지만, 한 알 한 알 모두 멀리 떨어져 접시 위 흩어진 모래알갱이 같다. 아니, 그들은 마치 고비사막의 흩어진 모래 같다.

그들은 각자 영웅을 기다리며, 각자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늘어트린다.

어째서인가? “빈도에게는 비선검이 있으니, 그대는 안심하고 노예가 되십쇼.”

“뒷일이 어찌되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러면 “들으러 오시지요.”

15~16 먹은 어린아이들이 몰래 아미산 오대산으로 달려가 도를 배우고 신선술과 검을 수련할 지경이다. 이러한 일들은 최근 1년 새 신문지 상에 보도된 것만으로 6~7 차례다.

이는 이미 기개 있는 호한이며, 영웅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되고 싶어 하거나 기다리는 것은 어떠한 영웅들인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스스로 생각해보라.

이런 영웅들이 섬기는 주인이란 포청천, 팽공, 시공 등 같은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영웅 그 자체 생각하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영웅이 섬기는 주인은 기껏해야 청백리다. 영웅 그 자체가 얼마나 고명한 인물이겠는가??

무협소설 시리즈의 삽화는 하늘을 가득 채우고는 중국 안을 날아다닌다. 그렇다면 중국의 세르반테스는…… 아직 요람 안에 있는가? 아니면 태반 속에도 없는가?

당신 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몇 만의 사람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허나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자 한다. “당신은 찻집에서 누가 책 듣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번역자 : 어.... 상당히 무시무시한 의식의 흐름입니다. 번역하면서도 혼란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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