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서호(西湖)에서의 결전 (1)

in #wuxia4 years ago (edited)

1929: 서호(西湖)에서의 결전
민국무림(民国武林)을 해부하다.
1929:决战西湖——解密民国武林,还原“一代宗师”

왕가위 감독의 10년 역작 <일대종사(一代宗师)>가 다시금 국민들 마음속의 무림정서에 불을 붙였다. 왕가위 감독은 스스로, 그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결코 단순한 상쾌한 복수(快意恩仇)의 무협 이야기가 아니며, 표현하려는 바는 민국무림(民国武林)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민국시기는 중국무술의 마지막 전성기가 될 수 있었을까? 당시의 무술은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을까? 전통 무술인과 중국 무술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영화를 본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여흥이 가시지 않았다.

1929년 절강성 항저우에서 1차 국술유예대회(一次国术游艺大会)가 열렸다. 그 대회는 당시 거의 모든 무림인사와 무술 조직을 망라했었다. 기자는 사료를 찾아보고 무술전문가를 방문하여, 중국무술의 전성기로서 그 지나간 무림을 드러내고자 한다.

“겨루기(把式)”에서 “무림(武林)”으로

1929년 5월 절강성 정부주석 장징쟝(张静江)은 서호박람회의 준비로 반년을 바쁘게 보냈다. 박람회 개막을 보고, 그는 곧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다시 한 번 “절강성 국술유예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사실 1928~1929년은 장징쟝이 정치적으로 매우 낙담한 두 해였다. 장징쟝은 국민당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쑨원의 혁명 배후의 주요 후원자였다. 쑨원은 이렇게 감탄했다. “동맹회의 성립 이후, 가장 용감하게 출자한 사람은 바로 장징쟝이다!”

1928년 북벌 성공 후 국민정부는 남경으로 천도했다. 본래는 경력으로 보았을 때 장징쟝이 핵심권력층으로 드는 게 순리였다. 하지만 그의 뿌리가 깊은 것을 꺼려, 장제스는 대권을 쥔 뒤로 중앙에서 그를 배제하여 절강성 주석으로 내보내버렸다.
새해를 맞이하며 장징쟝은 절강성의 진흥을 다짐하며 가슴 속 울분을 토해냈다. 서호박람회를 진행한 것은 절강성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신은 어떻게 하면 고조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해낸 것은 무술이었다.

청말민초 시기는 나라가 위태로웠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전통문화 또한 외래 문명 앞에서 무너지던 때였다. 유교는 5.4 신청년에 의해 전복되었고, 사회에서는 중의학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신화 같던 바둑 국수 장러샨(张乐山), 왕윈펑(汪耘丰)마저 이름 없는 일본 4단에게 패배하니…… 전통문화 전반이 패퇴하던 때였다.
이때 주류문화에 들지 못했던 “무술”이 갑자기 흥기하여 국민들의 정신을 고조시키고, 강국강종의 한 희망이 되었다.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师)>의 시나리오 작가 중 한 명 서호봉(徐皓峰)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림’이란 단어는 민국무협소설가 궁바이위(宫白羽)가 발명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무술하는 사람을 일컬어 ‘겨룬다(把式)’, ‘무를 행한다(武行)’라고 했었죠. ‘림(林)’은 고급문화 살롱의 개념입니다. 사림(词林)이나 금림(琴林)처럼요. ‘림(林)’을 더하면 품격이 높아지죠.”

항저우사범대학의 교수이자, 무술사 연구 전문가인 저우웨이량(周偉良)은 기자에게 설명해주길, 명청시기는 무술을 금지한 것은 무인사회의 지위가 낮은 직접적인 원인이라 했다. 당시에 무술을 익히는 이들은 자주 민간 종교와 함께 움직였다. 남방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반청복명(反清复明)”의 천지회(天地会)로 일명 홍문(洪门)이라 불렸고, 북방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쪽은 백련교와 의화단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모든 무술 익히는 교단을 ‘권교(拳教)’라고 부르며 엄격하게 탄압했습니다.” 때문에, 민간에서 무술을 익히는 것은 은밀한 환경 아래 진행되었다.

근대시기 민간무인이 처음으로 대중의 눈에 띈 것은 의화단 운동이었다. 의화단에는 무당이 많긴 했지만 그 기술이 탁월한 무예고수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을 이끌고 톈진의 노룡두 기차역을 습격한 대도(大刀) 리춘이(李存义)는 바로 저명한 형의권의 대가였다.
베이징 함락 후 여러 서양병사를 때려 죽였고 최후에는 서양 총기에 쓰러진 청팅화(程廷华) 또한 팔괘장의 거벽(巨擘)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탄쓰퉁(谭嗣同)의 탈옥을 모의한 대도오왕(大刀王五)과, 정무화의 창립자 곽원갑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사람들의 귀에 익은 강호협객들이었다.
허나 지금 사람들은 리춘이, 대도오왕, 그리고 곽원갑 모두가 표국을 열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청팅화는 베이징 안경점의 사장이었다.

서호봉은 기자에게 이르길, 비록 청말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대협의 이야기들이 주류문화에 의해 받아져 유명해진 것은 민국 이후의 일이라 했다.

청말, 일본의 부상에 혁명당원들은 크게 자극받았다. 그들은 전국민의 상무(尚武) 경향이 국민정신을 고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문명과 그 정신, 야만과 그 신체’는 당시 사회의 공통인식이었다.” 서호봉은 말했다. 이 때문에 서북군의 고위장교 장지쟝(张之江)이 국민당 정부에 “무술”을 “국술(国术)”로 고치자고 제안했을 때, 그렇게 빨리 정부 측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국(国)”이라는 글자를 통해, 사회가 무술을 중시하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929년 5월 3일 절강성 정부위원회 제 223차 회의에서, 장징쟝(张静江)이 제기한 국술유예대회 안건이 통과되었다. 비록 장징쟝은 절강성 국술관의 관장직을 겸했지만, 그는 닭 묶을 힘도 없는 문인이었다. 전국적인 무술대회를 열려면 국면 전반을 주관할 전문가가 없어서는 안 됐다. 때문에 그는 중앙국술관 부관장 리징린(李景林)을 떠올렸다.

중앙국술관의 힘을 빌리다

민국무림에서 리징린(李景林)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바오딩(保定)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장쭤린(张作霖) 밑으로 투신했다. 작전에 있어 용맹했기에 그는 빠르게 장쭤린이 아끼는 장군이 되었다. 허나 그는 1926년 서북군 고위장교 장지량과의 대결전에서 패배하고는, 그 뒤 군사계를 물러나 고위망명객(寓公)이 되었다.

기이한 일이 있어야 책이 되는 법일지니. 2년 뒤 그 전쟁 때의 원수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전쟁 때문이 아니라 무술 때문이었다.

1926년 장즈쟝이 리징린을 물리 친 뒤, 그는 오랜 군생활로 반빈불수의 처지에 이르렀다. 병에 걸린 뒤 장즈쟝은 주변의 권유로 태극권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반년을 하니 병세가 과연 좋아졌다. 본래 무술의 고장—하북성 창저우(沧州)에서 태어난 장즈쟝은, 중화무술의 현묘함에 감탄하였다. 이후 그는 군에서 물러나 무술보급에 전념했다.

1928년 중앙국술관이 남경에 만들어졌다. 장즈쟝은 직접 관장을 맡았다. 그러면 부관장은 누굴 앉혀야 하는가? 그는 그때 난징에 망명해온 리징린을 생각해낸 것이다.

군벌 외에도 리징린은 “무당검협(武当剑侠)”으로 알려져있었다. 리징신의 무당검에 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철로 수리를 담당할 때, 공병들이 지하에서 걸출한 “무림비급(武林秘籍)”인 “무당검보(武当剑谱)”를 발견했다. 본래 무공의 기초가 있던 리징린은 그 검보를 보고 천하에 비할 바 없는 무당검을 익혀냈다고 한다.

이 지극히 전설적인 이야기는 당연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리징린은 확실히 옛날부터 무당파의 전인 쑹웨이이(宋唯一)의 문하에서 검술을 배웠다.
“그의 검법이 얼마나 대단하지는 말할 게 못된다. 그가 무림에서 지위가 높았던 것은 일단 군사 정치 양쪽에서 모두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우웨이량(周伟良)의 말이다.

장즈쟝의 성의에 감동하고, 동시에 무술을 널리 알리고자하는 희망에서. 리징린은 흔연히 중앙국술관 부관장 직을 맡았다.

중앙국술관 건립 후 각 성, 시, 현마다 국술관이 들어섰다. 통계에 따르면 1934년 말에는 이미 전국에 24개의 성급 국술관이 있었으며, 현급 국술관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았다. 국술관 시스템의 성립은 무술을 널리 알리고 무술인재를 배양하는 데 있어 예상치 못한 작용을 했다. 중국무술 최후의 전성기는 국술관 시스템의 성립과 불가분한 관계가 있었다.

장징쟝은 리징린을 청해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준비주임을 맡겼다. 중앙국술관의 명성을 빌려 수많은 무림인사를 초청하는 것도 있었지만, 중앙국술관에서만 일찍이 이런 종류의 경기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 10월, 중앙국술관은 인재를 충원하기 위해 난징의 공공체육장에서 제1차 전국국술시험(일명 제1차 국시(国考))를 진행했다. 당시 시험은 연무대 형식이었고, 중량을 가리지 않음을 물론 보호구도 끼지 않았다. 주먹과 발을 그대로 썼었으며, 3선 2선승제였다.

무술을 겨루어 무림맹주를 다투었다. 이는 무협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다. 하지만 서호봉은 기자에게 말하길,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은 매우 드물게 발생했다.
“진정한 고수들은 손속을 겨루지 않아요. 악수를 하고, 한 눈에 대강 서로가 어떤지 알아보죠. 만약 상대방의 주먹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굳이 망신당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화 <일대종사>에서는 궁바오션(宫宝森)과 엽문(叶问)이 금루에서 병전을 두고 겨루는 장면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난 일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통 무인들은 모두 체면을 중시했다. 한 사람이 무술을 겨루어 이기고 지는 것은 그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한 문파 전체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때문에 모두들 이런 공개 비무를 극력으로 피하려 했다. 한 번 손을 쓰면 생사를 걸고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호봉의 말이다.

제1차 국시는 중국무술 사상 최초로 공개된 비무대회라 할 수 있다. 제1차 국시는 문파의 제약을 타파했고, 선수들은 자기 문파의 영욕을 짊어지는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장면은 상당히 처참하여, 뼈가 부러지고 힘줄이 끊어지거나,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는 등이 매우 흔했다.
제1차 국시 우승자들 중에는 이후 중앙국술관에 들어가 가르친 사람이 많았다. 제1차 국시는 결코 조직적으로 매우 원만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값진 경험이었다.

장징쟝의 초빙을 받은 후, 리징린은 흔쾌히 항저우로 가 서호의 커좡(柯庄)에서 준비위원회 회의소에 들어갔다. 1929년 10월 11일 서호박람회 폐막 당일,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준비위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번역자: 전 이런 스토리가 제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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