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연구) 38선 돌파와 북한의 군사력 운용의도 그리고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의미

북한이 한국전쟁을 시작할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자신들이 가진 군사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운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될 즈음 북한군의 군사력은 크게 세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내부에서 편성되고 조직된 사단들이다. 이런 사단들은 1,2,3,4 사단과 105 전차사단이다. 소련군의 지도에 의해서 창설된 사단들이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마자 북한군의 실질적인 창군은 시작되었으며 주로 소련출신과 북한내부의 인원으로 충원된 부대가 편성되었다. 물론 당시의 주요 무기들은 모두 소련제가 지급되었다.

두번째는 중공군에서 들어온 군대이다. 물론 1949년에도 일부 병력이 중공군에서 북한군으로 넘어와서 사단편성에 참가하지만 1950년 3월에 중국에서 3개사단(6, 12, 5)사단이 들어오면서 실질적인 전쟁준비가 갖추어 졌다.

세번째는 예비이다. 북한은 1군단에 2개사단(13, 15), 전략예비에 1개사단(10)을 준비했다.

북한은 서울을 지향하는 축선에 3개의 보병사단(3,4,1)과 105 전차사단을 집중투입했다. 그리고 김포방면에 6사단, 춘천축선에 2사단과 12 사단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5사단을 투입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내전에서 상당한 전투경험을 치르고 북한에 들어온 3개사단을 어떻게 운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앞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강력하게 편성된 4개의 사단을 집중투입하여 서울방향으로 진출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서울로 신속하게 진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집중적인 군사력 운용은 소련군 작전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집중적으로 군사력을 운용하여 적을 조기에 붕괴시키면 신속하게 계속진출하여 상대방이 대비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상대방이 예비대를 투입하여 강력하게 편성된 주공의 진출을 저지하면 주공의 양측면에 위치한 조공부대가 신속하게 진출하여 상대방이 투입한 예비대의 후방까지 진출하여 조기에 작전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독일과의 동부전선에서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당연히 상대방도 건곤일척의 싸움을 하는 바이기 때문에 중앙이 돌파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런 노력을 역이용하는 것이 소련군 작전술의 일반적인 경향인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공의 좌우에서 우회기동하여 투입된 상대방의 예비대 후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침 북한은 국공내전을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갖춘 3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제일 먼저 6사단으로 하여금 김포를 거쳐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함으로써 한국군을 한강선 북방에서 섬멸하고자 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미흡할 경우를 고려하여 춘천에서 수원방향으로 신속하게 진출하여 한국군에 대한 이중 포위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한국군 지휘관들은 빨치산 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예비사단들을 전방지역으로 투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 고문관들은 한국군의 그러한 조치가 오히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하여 전방지역 투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한국군 7사단지역으로 집중하여 공격했고 7사단 장병들의 용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 이후 한국군은 2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하였으나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시키지 못한채 제2사단 전체가 소멸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북한군 6사단의 진출과 관련된 것이다. 만일 북한군 6사단이 신속하게 진출하여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했더라면 한국전쟁은 바로 끝나버리는 상황이 될수도 있었던 것이다. 북한군 제6사단의 초기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백선엽이 지휘하던 한국군 제1사단은 6월 25일 하루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1사단의 붕괴와 육군본부는 6월 26일부로 김포지구에 남산학교라고 불리던 육군정보학교를 중심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수립하여 북한군이 김포반도로 도하해서 진출하는 것을 대비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 이후 잡다한 부대로 편성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북한군 6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당시 김포지구전투 사령부 소속 병력 거의 전부가 전사하는 상황을 겪었다. 초대 사령관이었던 학교장 계인주 대령은 현지 이탈하여 도망쳐 버렸다. 부교장이던 최복수 중령과 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이 그 이후 제2대, 3대 사령관을 맡으면서 분전한다. 그 전투과정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병옥 중령은 김포공항으로 진출한 북한군 6사단에 대한 공격에 앞장서서 짚차에 기관총을 달고 사격하면서 산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최복수 중령은 김포개화산에서 북한군 6사단의 공격에 맞서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자 그 자리에서 권총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육군 예비이던 3사단과 제1사단의 13연대가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을 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인지 분명하게 알수는 없지만 국공내전을 치른 북한의 정예 6사단은 신속하게 영등포로 진출하여 서울을 후방에서 포위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전 초기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이 바로 북한군 6사단의 진출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국군 6사단이 춘천전투에서 승리를 함으로써 북한군이 한국군이 포위되는 위기를 넘겼다고 하면서 춘천전투를 춘천대첩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이런 평가는 일본의 자위대 장교가 쓴 전사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전사연구는 1970년대 중반 일본의 전사연구 수준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만일 한국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했었다면 지금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살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진정한 의미에서 친일을 극복하고 일본을 넘는 것은 우리의 역량에 달려있다. 그저 구호만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극일은 불가능하다. 능력과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자기나라에서 수백만명이 죽은 전쟁 하나도 제대로 새롭게 해석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나라를 누가 존중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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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ly an article that contains a story of past history,which gives meaning of history,@wisdomandjustice

Your blog and posts are very useful and very good. Thank you for sharing.

요새는 희생자 찾는데는 관심이 많지만 이런 쪽은 그다지 관심을 못 받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지요

이미 오래전에 정리했어야하는건데..
21세기에도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발전이 있는 법인데 우리는 그런 기초가 약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자기나라에서 수백만명이 죽은 전쟁 하나도 제대로 새롭게 해석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나라를 누가 존중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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