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연구 출범 선언 2, post 2

아래의 한국전쟁 출범선언 1에 이어서 이번 포스티에는 2를 올립니다. 한국전쟁사의 순수한 군사적인 측면, 작전사와 전투사에 대한 연구를 출범한 이유에 관한 글입니다.

한국전쟁연구 출범선언 1

대부분 국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사는 군에서 직접 작성을 합니다. 군대는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했는지 그래서 어떤 결과나 초래되었는지를 검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잘 찾아서 그것을 고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전쟁사를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클라우제비츠도 그의 전쟁론에서 전쟁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패권을 지녔던 국가들이 전쟁사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서 거의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했던 우리나라 군은 미국의 전사연구 시스템을 많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껍데기만 받아 들이고 알맹이는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군이 6.25 전쟁에 대한 연구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에 대한 연구도 독점을 했습니다.

오랜기간 동안 전쟁에 대한 연구를 군이 독점하다보니 다른 해석이나 분석이 자리할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무에 대한 연구나 관심을 천시한 듯 합니다. 조선시대에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기풍이 아직까지도 이어진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잘살고 힘있는 나라중에서 무를 천시하는 나라는 단 한곳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 이유는 유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고려가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울때도 군대가 동원되었고 연산군과 광해군을 몰아낼때도 군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사에서 3번의 유교적 질서가 무너졌을 때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군대였습니다. 그러니 무를 천시하는 것은 유교적 질서의 핵심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이후의 호란을 당하고도 군대를 제대로 양성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

한국군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독점하면서 한국전쟁의 해석 또한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작전이나 전투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이후에는 그런 작업들이 매우 체계적으로 진행이 되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런 작업이 소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전쟁당시에는 학문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던 학자 연구원들이 군대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당연이 초기에는 체계적으로 자료가 축적되고 관리가 되었습니다.

한군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각종 작전이나 전투에 대한 자료의 수립이나 관리가 소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군대에서 봉급을 받고 생활하던 전문가들이 모두 대학으로 대학으로 연구소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한국군의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경향도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수행된 각종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한번 내용을 정리하면 그 내용은 교조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검토되거나 평가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성공한 것으로 재평가된 전투는 춘천전투가 유일합니다. 애초 육군은 물론이고 6사단 자체도 춘천에서 3일간 방어한 것을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서울도 3일만에 떨어졌고 춘천도 3일째 철수를 했으니 그것가지고 성공한 전투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일본 자위대에서 소련의 자료를 이용하여 북한이 춘천방향의 북한 2군단으로 하여금 수원방향으로 우회기동하여 한국군을 포위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것이 6사단에 의해서 좌절되었다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춘천전투에 대한 평가가 완전하게 달라졌습니다. 패배한 전투에서 춘천대첩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춘천전투를 제외한 어떤 내용도 이렇게 극적인 평가를 받은 경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의 승패에 대한 해석을 군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이 작전사와 전투사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면서 한국군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습득해야할 당연한 교훈들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통상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작전과 전투에 관한 평가도 지속적으로 새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간 우리군은 북한이 어떻게 작전을 수행했는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사를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이 전쟁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른채 전쟁사를 기술했습니다. 중공군이 어떻게 작전과 전투를 수행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1950년 이후 지금까지 군대에서 작성한 전쟁사는 큰 틀의 담론 구조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고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담론구조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전쟁사가 그런 식으로 기술된 것은 당시 군의 수뇌부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쟁초기 한국군 수뇌부는 어머어마한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기록들이 없어졌습니다. 일부는 고의로 파기한 정황도 없지 않습니다.

미군이 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한 이후의 작전은 비교적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한국군이 수행했던 초기작전에 대한 기술은 매우 일방적입니다. 이런 일방적 기술은 한국군의 작전적 전술적 상상력 제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번 연구는 우선 한국전 초기 단계로 부터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과정에 대해 작전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려고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기술경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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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포스팅이네요.
스팀잇에서 소통에 즐거움도 있지만 배움에 즐거움도 크네요
감사합니다.

적확하게 기록되어져야하는 역사지요. 전쟁사에 관심이 먾은 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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