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설화와 인터랙티브, 디지털 혁신

in #storytelling7 years ago

구비설화는 그 자체로 상호작용적(interactive)이었다. 화자가 이야기를 연행하면, 청자는 추임새를 넣거나 질문을 던진다. 청중의 개입은 당연했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살을 덧입었다(김광욱, 2008). 생산자와 수용자의 경계도 없었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이야기판이라는 시공간적 동시성 속에서 양방향으로 소통했다. 둘의 구분은 모호했고 위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구비설화는 하이퍼미디어기도 했다. 링크를 클릭하면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설화나 민담의 화자는 청자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정보를 그 자리에서 구연했다. 이야기를 하다 노래를 읊조리거나 춤을 추기도 했고, 때론 눈물도 흘렸다. 인터랙티브가 디지털만의 배타적 특성이라는 인식은 그래서 오류다. 구비문학 속에 인터랙티브는 태생적으로 내장돼있었다. 구술문화가 활자의 환경에 갇히면서 인터랙티브는 탈각됐고, 역사적 동결 상태에 들어서게 됐다.

맥루한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자 시대가 도래하면 활자 시대에 와해됐던 구술문화 시대의 다양성을 다시 찾을 것이다”라고. 맥루한은 구술문화와 디지털미디어를 사실상 닮은 꼴로 본 것이다. 활자에서 방송으로 옮겨오면서 미디어의 구술 특성은 한층 강화된 측면이 있다. 디지털은 구술로 향하는 진화의 경로를 한 단계 더 밀어올렸다. 디지털이라는 공간은 구술의 복합적 감각이 되살아나고 상호작용성이 재활성화되는 이야기판이다. 활자 매체보다 더 대화적이고, 비선형적이며, 다채롭다(이상철, 2003). 뉴욕타임스의 스노우폴을 떠올려보라. 활자가 제공하지 못했던 상호작용성은 더욱 높아졌고, 구술의 속성은 방송을 넘어섰다. 비로소 구술문화의 인터랙티브가 디지털이라는 공간 속에서 온전하게 구현된 것이다.

구술문화와 디지털, 그리고 몰입

인터랙티브는 이야기의 몰입을 촉진한다. 원래부터 이야기는 몰입의 장르다. 시도 소설도 연극도, 관객과 청자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이야기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설화는 화자와 청자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몰입감을 높인다. 하물며 기사라고 다르지 않다. 독자들의 몰입을 자극하기 위해 다양한 문맥적 장치를 풀어놓고 독자들의 주의를 기대한다. 몰입과 상호작용성은 서로를 부추기고 자극하며, 이야기의 힘을 증폭시킨다. 이런 과정 모두를 실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른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서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와 이야기하기, 이야기판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이야기판에 따른 이야기의 변주까지도 범주 안에 포함된다.

기사도 스토리텔링의 한 양식이다(최혜실, 2003). 하지만 국내 저널리즘은 스토리텔링의 본질은 외면한다. 디지털이 복원한 구술성과 상호작용성을 가볍게 평가한다. 활자의 속성을 그대로 복제해 기술만을 적용한다. 그리곤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고 포장한다. 디지털 혁신을 기존의 스토리텔링(기사 쓰기)에 기술을 접붙이는 작업쯤으로 치부한다. 역피라미드니 하는 예전의 이야기판에서 굳어진 이야기하기의 관습은 놔두고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방향성도 마찬가지다. 현대 미디어의 일방향성은 이야기의 본질과는 애초부터 아귀가 맞지 않았다. 청자, 즉 수용자의 관여를 배제하고 참여를 차단해온 역사는 결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의 플랫폼에 의해 쉽게 뒤집어졌다. 디지털에 밝은 실리콘밸리의 기술 전문 그룹들은 새로운 이야기판을 만들어 더 쉽게 청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기사라는 딱딱하고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보다 구술적 형태로 표현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췄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는 설화가 구연되는 사랑방과도 같은 공간으로 지금은 자리를 잡았다. 반면 뉴스 미디어들은 신문에서 방송으로 이어지던 구술화의 경향성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여전히 활자의 일방향성에 집착했고, 활자의 품격에 매진했으며, 활자의 권위에 의존했다. 말의 미디어인 방송은 활자문화에 스토리텔링을 고수한 채 구술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뒤늦게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뛰어들었지만, 활자적 사고의 관성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혁신의 본질은 스토리텔링

어느덧 디지털 혁신에 회의적인 시각들이 늘어났다. ‘비용대비 효과가 없다’, ‘많이 클릭하지 않는다’ 등등 불만의 목소리는 현상에서 힘을 얻고 있다. 한 건의 인터랙티브 스토리보다 한 건의 연예뉴스가 실질적 유익이 크다는 지적도 만만찮게 들린다. 하지만 이 논의 속에 스토리텔링의 혁신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나눠지지 않는다. 이야기가 지닌 힘과 몰입은 늘 후순위로 밀려난다. 디지털 혁신은 변화한 이야기판에서 이야기에 힘을 더하는 작업이다. 인터랙티브는 잃어버린 구술적 이야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경로다. 데이터 저널리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은 기술의 용어가 아니라 서사의 언어다. 어떻게 청자의 위상을 이야기판 위에 복원시키고, 어떻게 화자와 청자가 다시 상호작용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절차다. 디지털 혁신은 구술문화 이후 사라졌던 이야기의 복합 감각적 강점과 상호작용성을 다시 살려내겠다는 의지 위에서 출발할 때 어그러지지 않는다. AI 스피커라는 새로운 이야기판에서 기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묘책도 결국 이 같은 전략 위에서 상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기술은 이야기의 힘을 증폭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개발자가 결합하고, 데이터 엔지니어를 채용한다고 해서 허술한 이야기와 관습적 스토리텔링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인터랙티브 기사의 화려한 디자인으로도 이야기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다. 디지털 혁신의 출발점은 스토리텔링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명제를 분명히 인식해야 회의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대가 변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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