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친구와 새로운 친구

in #story6 years ago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물건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참으로 공감하는 말씀이다. 옛 친구를 만나 추억을 나눌때 우리는 철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친구는 소중하기만 하다. 오랫만에 만나더라도 시간 가는줄 모르고 그 시절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격의 없이 실토한다. 사람들은 힘든 일에 부딪칠때 추억이 쌓인만큼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그 분위기를 이어 현실까지도 공유 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경쟁사회가 되면서 오랫만에 만난 친구에게 지금의 마음을 들춰 내기에는 참 생뚱맞다. 벌써 강산이 몇번 바뀌면서 처지들도 몇번 바뀌다 보니 속 마음을 들춰 내기에는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이 있다. 고만고만한 자존심이나마 지키기 위해 우리는 모두 외로운 길을 선택한다. 혹여 속마음을 털어 놓을라치면 돌아서는 뒷통수가 창피하고, 내 이야기가 어디로 전달될까 걱정도 되고, 심지어 다시는 그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서 친구로 남기를 원하면 생뚱맞은 하소연은 금물이다.

나이50이 넘어서 속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한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나는 성공한 삶을 살지 못한것 같다. 가슴이 답답하고 위로받고 싶을때, 목놓아 엉엉 울어도 다독여줄 친구가 필요할때에도 자존심이라는 또 다른 내가 막아 선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모든 가치는 물질에 비례한다. 이런것을 자격지심이라 하던가. 남편의 연이은 사업 실패와 힘들어진 가정 경제로 낮아진 자존감이 문제일 것이다. 또한 빛의 속도로 발달한 매스미디어도 한 역활을 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혹여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 놓았다가 순식간에 내 이야기가 도마에 오르고 추측이 난무하여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한 몫 차지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는데에 굴곡이 있기 마련이지만 혹여 나를 부러워했던 친구들의 표적이 되는것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것이다. 살아가는 모양은 비슷비슷하다.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하냐는 문제일 뿐임을 알면서도 자신감이 떨어진다. 세상이 뒤집어질 만큼 큰 문제는 거의 없다. 경제적 난관, 남편문제, 자식문제... 간단히 포장한 단어들 안에는 각자마다 산의 정상에서 가장 깊은 계곡 사이를 오고가는 고통이 숨겨져 있을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말 할 데가 없는 사람들은 신경증에 시달린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깔깔거리다 헤어져 돌아오는 마음은 손에 움켜진 모래가 빠져 나가는듯 허탈하기만 하다. 갇혀진 아파트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속마음의 세상과 겉모습의 세상 두가지로 사는듯 하다.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 고립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살다보면 우리는 결국 인공지능 로봇을 사서 내가 만족하는 답만 설정해놓고 로봇과 말하고 의논하고 위로받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애완견과 살고들 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로봇과 사는게 편하고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인간들은 친구도 만들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낳지 않고 그렇게 혼자 늙어가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로봇에 의해 지배 당하고 말것이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미래다.

모든 생명체는 무리지어 살아야 한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면 살아가는 동력이 떨어지고 삶을 지속하기에 힘이 든다고 한다. 인간도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자존감이 떨어진 힘없는 사람들은 자존심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쌓인 스트레스를 내던지지못하고 누가 볼세라 꽁꽁 쌓아둔체 보기 좋은 모습을 연출하는 삶은 내것이 아니다. 다행히 요즘 들어 본질은 묻어두고 가짜 나를 만드는데 더 치중하던 인간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각자 외로움 병에서 탈출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이는 길에서 만난 선교원의 친절한 말과 추켜세움에 위로받는 기분으로 이상한 종교에 들어 가기도 하고 , 용기를 내어 뜻을 가지고 있던 봉사단체에 문을 두드리기도 하며 다양한 방법을 검색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닫아놓은 빗장을 풀기는 쉽지가 않다. 어디에 발을 들여 놓아 봐도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불편 하기만하다. 고립을 자초하던 시간들의 반란인것이다. 이런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 할 수 없다. 사회의 흐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혼자 해결하기는 나와 사회의 괴리가 심하다. 사회가 나서서 소통하는 세상을 위하여 노력을 해야 할 때이다. 사회 흐름을 파악하던 지방 자치 단체들은 평생 교육을 운영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살기 좋은 복지 국가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부분 프로그램은 배움, 소통, 치유부분으로 나뉘어진다.

2018년 봄 신중히 프로그램을 검색하던중 눈이 멈춘 주제가 있었다.가슴 따뜻한 주제면서 치유가 목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처음 만난 분들과 첫 수업을 시작했다. 나이 차이도 세대차를 느낄만큼 다양했다. 신기하게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인상을 쓰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하고 , 다행이라는듯 안도의 표정을 짓기도 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3-4명의 조원들은 50분이 짧게 느껴질만큼 꾸밈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하며 토닥여 주고 나니 몇십년지기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나도 3년 전쯤 생긴일을 항아리에 꽁꽁 담아서 천으로 몇겹을 덮어 고물줄로 새나가지 못하게 동여맨뒤 뚜껑을 닫아 깊숙이 숨겨둔 상처가 있었다. 설마 처음 만난 분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털어 놓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밀어넣으려해도 항아리는 뚜껑이 열리고 싶어 했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니 정말로 마음이 가벼워져서 날기라도 할듯 했다. 그동안 묶혀 두었던 항아리를 열수 있었던건 그분들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나를 알지 못하고 경쟁할것도 없고 더우기 나이차가 많아서 듣는 사람의 공감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건 바로 치유다. 선조들의 말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옛 사람만 좋은게 아니라 새로운 사람과는 또 하나의 역사가 쓰일수 있다고 생각 하니 세상이 살만해졌다.

세상은 늘 변한다. 친구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과의 교류가 새로운 나를 끄집어 낼수도 있음을 상기해야겠다. 게으름에 동반된 무기력증은 운동도 하기 싫고, 그렇게 좋아하던 쇼핑도 하고 싶지 않고 끊임없이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젊은 시절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해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여행을 하며 창의적인 영감을 얻기도 했다. 몸이 지치고 쉬고 싶을때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안된다. 게으름과 무기력을 거쳐 우울증까지 가면 결국 치매로 이어질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있다는건 표현 할 수 있다는게 아닐까? 말이든 행동이든 표현해야만 한다. 말은 본능이라 대상이 없으면 혼잣말을 한다. 종일 혼잣말을 하던날 저녁에 식구들이 들어오면 끝없는 말문이 터진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느낀다는 표현이다.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아이들은 "이야기 끝날려면 아직 멀었어요?"라고 미안한듯 바쁜 표정을 짓는다. 서운해져서 아이처럼 쌜쭉거린다. 그나마 시간이 더 지나 밤에도 혼자 남게 되면 혼자 말만 하고 살것인가? 그럴수는 없다. 현실과 말의 세상이 뒤섞여져 혼돈이 올것이다. 요즘 1인 가구가 늘어가고 모두 편안함이라는 착각으로 문을 닫고 스스로 고립 되어 가는 편치 않은 흐름은 사회가 무거워지는 가장 큰 원인인것 같다.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힘이 들더라도 소통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빗장을 걸고 소외되어 가지 않을것이다. 자본주의는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수평적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과 등지지 말고 관계를 맺어야한다. 게으름을 버리고 고립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사람 속에 머물러야 한다. 작은 모임들이 잘되는 곳은 건전한곳이다. 마치 블록체인처럼 서로 연결되어 한곳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머지들이 든든히 받쳐주면 사람들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재미 있어질테니까 새롭게 연결되어 수평적 관계들이 형성되겠지.

내안에 갇혀 기억을 왜곡하면서까지 차곡차곡 쌓아둔 독을 이제 하나씩 열어야겠다. 상처의 보따리를 이야기 보따리로 희석시키면 아픈 기억에서 자유로워 질 것이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 방황한다.그러면서도 옛 기억을 버리지 못하니 새로운 교류를 한다는건 부담스럽기만 하다.생각을 조금만 바꿔보자. 결코 나만 그런게 아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외롭고 동무가 필요하다. 변화에 용감히 적응하고 만남과 협력을 통해 그 안에서 '나'를 찾아보자. 인공지능에 지배 될 것을 염려하기 보다 인간만 나눌 수 있는 '정'을 사회 곳곳에 심어 훈훈해지면 고립된 인간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덜 만만 할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먼저는 내가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고 사회는 활기가 넘치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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