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행위는 하지만 기도를 가르치지 않는 우리네 교회

in #steemchurch6 years ago

공부를 하지만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있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방송에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습만 시킨다는 게 아닌가? 하루 종일 자습만 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학생이라면 성적이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우리네 교회에 있다. 기도행위는 하고 있지만 기도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서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그런데 기도를 가르치지 않고, 알아서 기도하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제대로 기도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시간만 채울 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이 만나준다는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알지 못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우리네 주변에 허다하다. 자신들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교인들에게 그런 기도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네 교회에는 신학교를 나와야 목회자가 되고 교회지도자의 신분이 된다.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기도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신학적인 학문을 가르칠 뿐이다. 그러므로 신학교를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별개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공부를 하는 것과는 별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만이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교제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가르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기도회를 만들어 열정적인 참여를 독촉하고 있지만, 기도회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교회의 기도회에서는 목회자가 원하는 기도 목록을 큰소리로 외치거나, 각자 자신이 소원하는 기도목록을 주구장창 외치는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인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드물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기도란 헬라어로 ‘프뤼스케’라는 단어이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며 간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기도자리에 앉아서 기도의 목록을 나열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듣는 기도는 내용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하겠지만,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15:29)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

위의 말씀을 보면 누구나 기도한다고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의 기도만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그런 가르침이 일언반구도 없다. 오직 희생적인 기도행위만을 요구한다. 새벽기도회에 나오거나 헌금을 드리면서 기도하거나, 기간을 작정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닦달하고 있다. 이런 기복신앙에서 나온 희생적인 기도행위는 자신의 의만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고 기도자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자신들이 악한 성품을 고치려 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여 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축복만을 바라고 탐욕을 채우는 간구만을 반복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으시겠는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1~15)

하나님은 죄악을 행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눈을 가리고 외면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말과 행동, 성품과 생각을 총망라하는 단어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지 않는 죄이다. 피조물이자 종인 자녀들이 창조주이자 주인인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가장 가증스럽게 여긴다. 하나님은 종일토록 팔을 벌리고 자신의 백성들이 찾아오기를 바라시지만, 자녀들은 탐욕을 채우고 방탕을 즐기느라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다. 그러다가 불행한 사건이 터지고 곤고한 삶의 문제가 생기면 부랴부랴 기도자리에 앉아서 해결을 읍소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증스럽지 아니한가? 그게 아니라면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으로 관행적인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의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 1,20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가증스럽게 여기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새벽에 나와서 목회자와 다른 교인들에게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드러내고 있는 기도회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겠는가? 그들이 내뱉는 기도의 내용도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며 세속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게 기도하는 교인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적인 기도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지도자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고 무능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반복하는 이유이다. 기도란 하나님과 깊고 교제하는 통로이다. 성경적인 기도의 핵심은 쉬지 않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부르고 찾으며,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도 특정한 시간에 교회건물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삶의 현장에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깨어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도를 가르치지 않고, 맹목적인 기도행위만을 반복하는 우리네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리가 없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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