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일상

in #social-science6 years ago

천국보다 낯선 일상

“세계는 결코 천국이었던 적이 없다. 옛날이 더 좋았고, 지금은 지옥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진흙투성이여서 그것을 참고 견디며 더 나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사랑과 신념을 필요로 했었다.”
-헤르만 헤세-

천국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세상이 더 지독하고 메마른 만큼인가? 아니면 내가 더 메마른 만큼인가? 사람들이 더 자주 천국을 가리키면서 손가락만을 보는 횟수 만큼인가? 아니면 뻗은 손 옆에 슬며시 벌린 손이 원하는 만큼인가?

아마도, 천국은 한 번도 멀리 있었던 적이 없다. 또한 천국은 한 번도 정해진 적이 없다. 우리의 가슴 속에서, 그리고 머릿속에서 천국은 여러 번 만들어졌다. 천국의 설계도는 수 백 장이 넘고 모두 다른 언어로 써졌지만, 그것은 모두 바벨탑의 언어였을 것이다. 천국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험이며 서로 다른 생각의 계단에 흩뿌려져 있는 꽃잎 같은 존재이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무엇 –그 누군가가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떠올려도 좋다- 은 모두 천국을 이루고 그 자체가 천국이 된다. 그것을 천국이라고 부르던, 낙원이라고 부르던 유토피아라고 부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천국은 ‘도달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매일의 고단한 일상 속에서 얻고자 하는 무엇에 더 가깝다. 천국은 일상의 모든 추함과 악함, 부조리함을 지워버린 매우 추상화된 일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천국을 어려운 언어로 설명할 어떤 필요성도 느끼지 못 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 못 하더라도, 천국이라는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온다.

관념 속에서 존재하기에, 천국의 형태는 정해지지 않았으며 언제나 자유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영혼들의 삶 속에서 천국이 단일한 형태로 존재한 적은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없었다. 천국을 향한 길을 걷고자 많은 이들을 설득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이끌려 발을 내딛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리는 그림은 모두 달랐다.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의 관념으로 인정되었다. 한 마디로, 천국은 개념화된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세계는 결코 ‘천국이었던’ 적이 없지만 천국은 언제나 애매하게 이 세상을 떠돌았던 것이다.

오히려, 천국보다 낯선 것은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이다. 대부분의 순간은 그것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무미건조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켜켜이 모여서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즉 누군가의 인생으로- 다가올 때,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그 흐름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 때, 그리고 한 공간에서 다양한 흐름들이 교차해 사회를 이룰 때 우리들은 스스로의 순간들을 낯설어한다.

순간들, 그리고 순간들의 흐름들은 천국과는 달리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천국을 그리는 만 가지 연필은 만 가지의 다른 안도감과 즐거움을 만들어내지만, 자신의 삶을 엮어내고, 나아가 수많은 사람의 삶 속에서 뚜렷한 의미를 찾아내 엮은 만 갈래의 실타래는 만 가지의 갈등, 충돌, 대립, 모순, 권력을 내포한다. 그것을 자의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은 현실의 그 어떤 것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고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가닥의 선을 그려내는 일은 현실에서 결코 녹녹하지 않다. 사람들은 낯선 일상들을 최대한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상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성찰하는 일을 종종 혹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멈추는 것이다.

제대로 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무게에, 속도에, 그 중압감에 짓눌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일상을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이나 놀라움을 불러올지도 모르지만, 사회라는 얽힌 실타래들을, 많은 이들의 순간이 담긴 공간을 자기 취향에 맞게 임의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은 한 번도 학문의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같이 인간이나 인간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목적이 된 적이 없다. 그것들을 풀어나가고 가지런히 함으로써 원리를 규명하고 사회의 자기이해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모두 사변이 아닌 현실의 문제 해결 –문제를 어떤 주체에게 유리하게 해결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루고-을 위함이었다. 순수한 학문이라는 말과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말은 단지 실타래로 묶이는 순간들과 그 실타래들의 날것으로서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만 유의미하다. 이런 수식어들은 그것을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순수함’ 이나‘ 객관적’이라는 말이 다분히 목적을 띤 순수함과 객관성이기에, 고전적이지만 언제나 잘 먹혀들어간 또 하나의 지적 사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식을 비판적으로 학습하고자 하는 사람은 순수학문과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된 권위로 근대 학문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을 비전문가로 적용하는 기제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사회과학이 우리 사회의 모습과 사회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잘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또 그럴 수 있도록 공부하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이 의무를 ‘질 수 있는’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사실을 현대 사회의 비망록에 적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특별한 소수’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들이 가야할 방향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명확히 밝혀준다.

모두에게 익숙한 천국을 더 어려운 용어로 그려내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그린 천국이 공감을 사지 못 한다고 천국의 문을 더 굳건히 단속할 베드로를 찾는 일은 사회과학도의 일이 아니다. ‘나의 몫’을 다하며 살아나가고자 하는 개인의 일은 더더욱 아니다. ‘언제나 진흙투성이인’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꾸어나가는 지혜를 위해 천국보다 낯선 일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빛을 찾는 방법이다. 그것이 아직 어설프지만,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정말 할 수 있는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내가 ‘나의 빛’을 찾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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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스팀잇이 천국이 될겁니다 ㅎㅎ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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