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의 부동산 시장이 안정적인 이유는

in #quebec7 years ago (edited)

캐나다의 다른 주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락할 때 퀘벡의 부동산 시장이 안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세입자 보호 정책 때문이다.

부동산 시장을 잡기 위해 부동산 보유세나 양도세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부동산 보유자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정책을 피는데, 보완적인 수단으로 건물주-세입자 간의 관계에 주목하여 세입자 보호를 강화하는 수단을 쓰는 것도 부동산 시장 안정의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세입자 보호와 부동산 시장 안정이 무슨 상관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퀘벡이 둘 사이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퀘벡은 세입자 보호가 워낙 좋다 보니, 특히 장기세입자들은 신규로 주택을 구매하기보다 기존 임대계약을 유지하려는 동기가 높다. 고소득층에서도 자가 보유 대신 임대주택 살이를 지속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주택시장에 투기수요가 적고, 가격은 적정선에서 유지된다. 다른 주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락할 때도 퀘벡의 부동산 가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퀘벡주 몬트리올에 이사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 집주인으로부터 낯선 문서를 받았다. 월세 인상에 관한 문서였다. 한국 같았으면 그냥 구두로 인상을 요구했을 텐데,하며 문서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공문서같은 느낌의 규격 문서였다. 집주인이 원하는 인상율이 적혀 있었고, 세입자가 동의하는 지 여부를 표시하는 칸이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관행이 낯설어서 월세 인상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주인이 정부에서 정한 양식에 문서상으로 세입자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월세를 인상할 수도, 퇴거를 요구할 수도 없다. 제시한 인상률을 세입자가 거부하고 퇴거도 거부할 경우, 퇴거를 요구하거나 인상률을 관철하고 싶으면 ‘주택 공사’ régie du lodgement 산하 중재기관에 제소를 해서 가격 인상의 불가피성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집주인이 깜빡 잊고 인상 요구를 기한 내에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같은 조건에 계약 연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일반적으로 세입자들은 물가 인상률 정도의 월세 인상에는 동의를 해 주는 편이다.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제시한 가격 인상의 불가피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에 정해진 가격 인상 요소들, 관리비, 전기, 가스, 난방유, 기타 서비스의 당해년도 공인 인정률을 토대로 정당성을 주장해야만 하며, 이 공인 인정률의 가이드 라인을 따르면 많아야 물가 인상률 정도를 크게 넘지 못한다. '주변 시세가 올랐으니 월세를 올리겠다'는 인정받지 못한다. 모든 사유가 정당하더라도, 세입자가 고령, 생계 곤란등의 사정이 있으면 월세가를 인상할 수 없다.

예전에 리쌍 소유 건물에서 세입자가 계약 갱신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퇴거 명령을 받아냈다는 얘기를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계약 갱신을 하려면 세입자 쪽에서 요구해야 하는데, 퀘벡에서는 계약 갱신을 원하지 않는 경우 건물주가 문서상으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월세를 밀리거나 기물을 손상하는 등 큰 잘못이 없는 한 집주인이 계약 갱신을 거부할 수 있는, 즉 퇴거를 요구할 수 있는 사유는 매우 심하게 제한되어 있다. 집주인 본인이 해당 주택에 반드시 입주해야 할 사정을 입증하거나 증, 개축 등 여러 사유로 반드시 공사를 해야 하는 경우 뿐이다. 이 경우에도 건물주는 반드시 문서상으로 계약 종료 사유를 설명해야 한다. 이 경우에 세입자는 중재재판소에 이의 제기를 할 수 있고, 집주인은 실제로 재입주를 할 사정이 있거나 증, 개축을 실시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영업용 부동산의 임대차 계약은 주거용 임대차 계약보다는 계약 자유의 원칙이 적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원칙들은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주택 임대차 계약이 대개 1년 단위인데 반해 임대차 계약은 단위 자체가 보통 5-10년 정도로 더 길다. 퀘벡 몬트리올에 온 후로 대형 체인이 아닌 소규모 마트, 소규모 식당들을 많이 보았다. 단골로 다니는 소규모 마트만 해도 바로 옆에 대형 수퍼가 있음에도 몇 십년 째 운영하고 있으며 3대가 같은 가게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8-6시로 평일에만 운영하는데도, 손님들도 꾸준하고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가게 주인분에게 물어보니 건물주가 계약 갱신때마다 월세를 올리려고 하는 점은 다르지 않지만, 한국과 같은 퇴거 압력은 받지 않는다 한다.

퀘벡은 중산층 이상에서도 자가 주택 보유 비율이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주택 보유세 및 모기지 이자율 등 주택을 보유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을 감안하면 월세로 사는 것이 더 유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몬트리올에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은데,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기가 몹시 까다롭기 때문에, 몇 십년 전에 임대차 계약을 맺어서 계속 살고 있는 경우 그렇지 않아도 캐나다에서 낮은 편인 퀘벡의 신규 월세 시세보다 현저하게 낮은 월세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자가 보유에 따른 비용과 비교할 때 훨씬 낮은 비용에 계속 세입자로서 불안감 없이 살 수 있다. 따라서 한국처럼 무리하게 자가 주택을 보유하려는 중산층의 주택 수요가 많지 않다.

과거에 노동 집약적 경제 중심지 였던 탓에 워낙 과거부터 있었던 주택 물량이 많은 것도 퀘벡의 부동산 가격이 다른 도시들보다 현저하게 낮은 원인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세입자 보호 정책이 퀘벡 부동산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낮은 것이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최근 한 경제지에서는 엄격한 세입자 보호가 주택 개선 및 신규 주택 개발을 위한 투자를 제약하여 주택 경기 활성화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학생, 청년 층이 낮은 예산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IT 벤쳐 창업 인프라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요즘 한국에서는 최저임금 상승 후 여러가지 문제제기가 있고, 민주당에서 지대개혁론을 들고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최저임금으로 겪는 영세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건물주나 카드 수수료 등의 문제로 완화하려는 것은 큰 틀에서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보유세 증세는 오히려 건물주가 세입자에 인상을 요구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퀘벡과 같은 세입자 보호 정책, 특히 영세 자영업자인 세입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하면 최저임금으로 나빠진 자영업자들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궁중족발은 철거 전 무려 네 배의 월세 인상을 요구 받았다고 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맘 상한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은 건물주의 무지막지한 인상 요구 및 강제 퇴거로 불안한 마음을 해소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책 아닐지. 우선 법률적으로 계약 갱신권 강화, 전/월세 인상폭 제한 등 세입자 보호를 강화하는 조치들을 법제화하고, 임대차 관련 분쟁을 조정하는 퀘벡 주택공사의 중재원 같은 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대안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경제에 정책적인 개입을 할 경우엔 경제 주체들의 사익추구 동기를 잘 이해해야만 효과를 낼 수 있다. 유명한 아담스미스의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제빵사의 사익추구 때문이다'라는 문장도 있지 않나. 부동산 시장 안정 같은 정책 목표를 추구할 때 시장의 중요한 경제주체들이 '왜 주택을 사고 싶어하는가'하는 동기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주택 경기의 지속적인 상승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면, 세입자가 주택을 사고 싶어하는 것은 집주인에게 집 없는 설움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 중요한 원인이다. 돈 있는 사람이 주택을 사고 싶어하는 것은 주택 보유가 다른 자산 보유에 비해 안정성있고 수익성 좋은 돈 벌이 수단이기 때문이다. 세입자가 집 없는 설움을 겪지 않게, 돈있는 사람들이 생산성 낮은 주택임대업에 너무 몰리지 않게, 퀘벡 방식의 세입자 보호 정책을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세입자 보호 대책을 강화해도, 안정성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은 수익성이 좀 낮아져도 주택 보유를 원할 것이다.

물론 퀘벡의 부동산 시장 및 사회 경제적 맥락이 한국과는 다른 점이 많기는 하지만, 퀘벡의 세입자 보호 대책을 벤치마킹하면, 부동산 시장 안정 뿐만 아니라, 최저 임금으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자영업 보호 및 소규모 자영업 활성화, 창업 환경 개선, 고용 문제 개선에도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한 기사]

주택 공사: 임대차 계약 갱신 관련 안내
https://www.rdl.gouv.qc.ca/https://www.rdl.gouv.qc.ca/en/renewal-of-the-lease-and-fixing-of-rent
퀘벡 부동산 가격이 부러울 정도로 낮은 이유
https://www.theglobeandmail.com/news/national/how-does-montreal-maintain-its-enviably-low-rents/article31285810/
몬트리올이 캐나다 부동산 상승세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
http://www.businessinsider.com/montreals-housing-market-is-very-different-from-canadas-boom-cities-2017-9
몬트리올 주택 가격 공개 웹싸이트, 주택 임대사업자들 불만
http://www.cbc.ca/news/canada/montreal/rent-prices-website-myrent-1.4159236
부동산 시장 개입에 반대하는 사설: 몬트리올의 현재 부동산 시장
http://montrealgazette.com/opinion/opinion-housing-is-best-governed-by-laws-of-the-market
https://gowlingwlg.com/en/canada/insights-resources/commercial-leases-in-quebec-(part-1-of-2)
소상공인이 임대차 계약 시 하지 말아야 할 일들.
https://www.huffingtonpost.com/melody-stevens/small-business-lease_b_15380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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