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2) 파소 팔자레고, 라가주오이, 도비아코

in #paris5 years ago

돌로미티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 중에 ‘파소 팔자레고’가 있다. 파소(Passo)는 고개라는 뜻이다. 높이 2,105m 산 위에 위치해 있는 팔자레고(Falzarego) 고개. 이곳은 매 년 ‘마라토나 들레 돌로미티 장거리 사이클링 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이 대회는 너무나 유명해 12년 전까지만 해도 전세계에서 수 만 명의 신청자들이 몰리던 대회였다. 이에 2004 년부터는 추첨으로 9,000 명을 뽑아 참가자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175 km의 길이 7 개의 고개를 오르 내리며 달리는 30년 전통의 사이클링 대회. 생각만 해도 숨이 차지만 사이클링 선수들에게는 꿈의 대회라 말할 수 있다. 그동안 팀으로는 독일이 큰 두각을 나타냈고 개인별로는 이탈리아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1998년부터는 여성 사이클링 선수들도 참여했다. 하지만 남성들에 비해 약 1시간 정도 뒤지고 있다. 올해는 7월 3일(화)에 대회가 열렸다.

팔자레고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650m를 오르면 다다르는 곳은 라가주오이 산군이다. 이곳에서는 토파나(3,244m) 암벽을 바라 볼 수 있고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친퀘토리’를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돌로미테 최고봉인 마르몰라다(3,342m)를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2,778m 산 위에서 바라 보는 돌로미티는 너무나 장엄하여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트레킹을 하다 보니 야외 박물관 ‘4호 초소’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하나 보였다. 이곳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간의 최대 격전지였던 곳이다. 포상(砲床)에는 당시 오스트리아 군이 사용하던 기관총까지 갖춰놓았다. 포상은 적의 사격이나 폭격으로 부터 화기와 장비를 방호하는 준비된 진지를 말한다. 저 아래에 있는 친퀘토리 지역은 이탈리아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던 곳이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초소에서 친퀘토리 진지로 들어 가는 모든 수송 통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탈리아 황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는 친퀘토리 진지를 방문하여 이탈리아군을 격려하기도 했다. 이탈리아군은 2대의 곡사포(149G)와 8대의 75mm 대포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했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의 공격보다는 추위에 더많이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 병사들이 대다수였다.

돌로미티 지역은 옛부터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다. 사람들은 양과 젖소를 키우며 우유를 짜고 치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면서 유럽은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1914 년부터 4 년동안 계속된 제1차 세계 대전은 천 만명이 죽고 2 천 만명이 부상을 당한 큰 전쟁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휩싸였으니 이탈리아는 두 나라를 도와야 했지만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켰다. 영국이 워낙 강국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는 영토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영국은 이탈리아를 런던 조약을 통해 회유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지역을 이탈리아에 귀속시키겠다고 약정한 것이다. 이에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에 합류하며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게 됐다. 길고도 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 가게 된 것이다. 결국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약정한 대로 돌로미티가 포함된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 지역은 이탈리아로 귀속하게 됐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죽은 이탈리아 병사는 378,000명, 부상자는 946,000명이나 됐다. 라가주오이 정상에 세워진 십자가상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것이다.

날씨가 좋은 날, 오스트리아군 복장을 한 ‘리인액터’는 라가주오이 정상에서 역사적인 전쟁 상황을 재현한다. 적을 향해 총을 겨누는가 하면 망원경으로 적의 동정을 천천히 살피기도 한다. 시대의 고증을 완벽하게 갖춘 리인액터는 들고 있는 총기마저 당시에 사용하던 총이라고 말한다. 불과 100년 전, 전쟁터의 군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를 두려움 속에 있어야만 했다.

1910년, 구스타프 말러도 도비아코(토블라흐)의 여름별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 딸은 죽고 자신은 병에 걸렸으며 아내(알마)는 청년 건축가를 만나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말러는 교향곡 제9번을 쓰며 “오 사랑이여 가버렸구나! 안녕! 안녕!” 이라는 글을 악보 밑에 휘갈겨 썼다. 작품에는 고뇌, 슬픔, 기쁨, 외로움, 환희, 과거, 현재, 미래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현세와 내세를 주제로 하여 이별을 고하는 교향곡 9번은 그의 인생에서의 마지막 고백서이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제9번 교향곡의 제목은 ‘이별’이 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말러는 수려한 돌로미티를 보며 교향곡 9번을 창작해 세상에 내놓았다. 교향곡 9번이 왜 이렇게 가슴을 치는지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다. 그 속에는 돌로미티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속이 뻥 뚤렸다.

여행팁: 케이블카(어른 14.5유로)
라가주오이 산장(Rifugio Lagazuoi)에는 74개의 침대가 있고
숙박료는 30유로 - 67유로 등 다양한 선택이 있다.
산장에서의 샤워: 3.5유로, 아침식사: 10유로,
산장 오픈: 3월 3일부터 11월 6일까지.
산장에서 묵으면 돌로미티의 저녁노을과
아침 빛내림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 좋다.
자동차 파킹은 ‘팔자레고 패스 파킹장’에 하면 된다.

라가주오이 산정에서 바라 본 돌로미티와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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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산장에서 오후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방문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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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군 복장을 한 리인액터가 산 위로 올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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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으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리인액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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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산장에서 바라 보는 돌로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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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으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리인액터(왼쪽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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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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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정상에 오른 등산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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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정상의 등산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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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정상에 세워진 십자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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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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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와 매일이 행복한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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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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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정상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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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르면 가슴이 뻥 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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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떠나는 등산객들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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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砲床)에는 당시 오스트리아 군이 사용하던 기관총을 갖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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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이 4호 초소, 왼쪽에 보이는 오스트리아군의 무기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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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산장에 묵으면 바로 앞에서 사우나(Sauna)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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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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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산장(Rifugio Lagazuoi)에서 바라 보는 돌로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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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의 대포(75mm) 부대가 있던 친퀘토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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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정상에 오르려면 이런 케이블카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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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를 타면오고 내리는 것이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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