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40,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다. (마지막편)

in #palnet5 years ago (edited)

이가 아파서 한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이순흥 회장의 비밀연락원이 편지를 주고 돌아갔다. 1980년 4월 2일이었다. 이순흥 회장이 월공의 고위관리로 부터 한국 외교관이 석방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같이 있던 민간인 최기선은 석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첩보가 사실인지 그 다음날부터 한국외교관들이 인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하는 등 치화형무소측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4월 10일경 이대용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나 식품들을 그동안 신세졌던 월남 수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월 11일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석방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치화형무소를 나왔다.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한참을 달려서 불란서식의 큰 2층집으로 들어갔다. 월공 외교부 관리는 4월 12일에 높은 사람이 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구일까? 궁금했다.

4월 12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앞으로 20분후에 한국외교관 3명을 인계받기 위해 스웨덴 외무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2층 침실에 올라가 닳아서 비뚤어진 구두를 신고, 6년도 더 지난 긴 소매 와이셔츠에 2년전 이회장이 차입해준 월남제 긴 양복바지를 입었다.

응접실에 내려가자 마자 스웨덴 레이프랜드 외무차관, 스웨덴 닐슨 외무장관 비서실장, 그리고 석방교섭을 도와온 외국 유렵 그룹의 동남아지역 대표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대표단과 같이 차를 타고 탄산눝 공항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월공 외무부의 홍과장에게 치화형무소에 남아 있는 최기선의 석방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는 호의적인 답변을 했다. 곧바로 비행기옆으로 까지 갔다. 그자리에서 한국정부가 발급한 새로운 여권도 받았다.

오후 1시 20분경 육중한 제트항공기가 이륙했다. 월남땅을 떠났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주루룩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땅으로 떨어졌다.

밤 8시 25분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트랩을 내려 고국 땅을 밟았다. 이렇게 살아서 고국땅을 밟는구나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흘렀다. 공항귀빈실에 마중나온 정부요인들이 위로를 해주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부인이 신세계백화점에서 사서 보내준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구두, 양말을 갈아 입었다. 곧바로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으로 향했다. 12층 입원실로 안내해주었다.

조금있으니 가족들이 들어왔다. 열살때 헤어진 막둥이가 이대용보다 더 컸다. 세째는 얼굴이 많이 변해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부인은 이대용을 보자마자 이디가 제일 아프세요라고 물었다. 부인은 이대용이 무슨 암에 걸린 줄 알았다. 너무 살이 빠져서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치의 병에 걸려 얼마있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용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반가움보다 자신없이 살아온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연민때문이었다.


이것으로 이대용 장군의 기록에 대한 정리를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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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석방이 되어 고국의 품에 안기셨군요~
얼마나 감회가 깊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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