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마을의 하루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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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은 세계수 구조물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 멀어지고 나니, 주위가 빠르게 어두워졌다. 한결은 주머니에서 짧은 막대를 꺼내 들었고, 막대 끄트머리에서 빛이 나며 주위가 밝아졌다. 한결은 그 막대를 이용해 내려가는 계단을 비추며 아래로 내려갔다.
몇 번인가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한결은 가끔 머뭇거렸고, 때로 조금 길을 헤메었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적당한 길을 선택했다. 꽤 긴 시간 동안을 계단을 내려가자, 어떤 빈 방에 도착했다. 한결은 막대를 이용해 방 안을 이리 저리 비추었다. 한 쪽 벽을 향해 있는 망원경 같은 물건이 있는 것을 확인하자, 한결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엔, 마녀의 “그 물건” 이 있었다.
한결은 그 물건에 천천히 다가갔다. 물건 가까이에는 끈으로 테두리가 쳐져 있었고, 한결은 그것을 살짝 넘어갔다. 그 순간, 천장에서 빛이 나오며, 방이 확 하고 밝아졌다. 한결은 놀라 방 입구를 돌아보았고, 거기에 서 있는 만싸를 발견했다. 만싸는 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다.
“한결!”
“…만싸.”
한결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싸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결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세요, 만싸.”
“뭘 꾸미는 거지?”
한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잠깐동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어쨌거나 마녀를 되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예상하고 있었어. 묻는 건 그 쪽이 아냐.”
만싸는 도끼를 허리에 찼다. 한결은 만싸의 행동을 그대로 살펴보고 있었다.
“도끼를 던지거나 휘두르지는 않으실 겁니까?”
“네가 그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러려고 했었지.”
한결은 웨인이 쳐 둔 테두리가 마녀의 물건의 영향력의 범위를 표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웨인이 쳐 둔 테두리는 영향력의 경계선을 “볼 수 있게 표시해 둔 것”이다. 그 안쪽에 있을 때에는 마녀의 물건의 영향을 받게 되기 떄문에, 혹시나 누가 들어오지 않도록 선을 그어 둔 것이다. 한결은 만싸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결은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군요. 물러나십시오, 만싸. 당신은 이미 늦었습니다.”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그리고 그 전에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애나를 보호했지?”
한결은 앞부분에 대한 태클이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가 동의하지 않는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한결은 뒷부분만을 대답했다.
“애나가 죽는 것은 제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방해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괜한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요.”
“착하군.”
“감사합니다.”
한결은 인사하고 나서 다시 시선을 돌려서 마녀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마녀의 물건은 벽 속에, 정확히는 세계수 안에 파묻혀 있었다. 망원경과 같은 커다란 구조물은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마녀를 되돌리려고 하지? 애나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네가 왜 요정과 인간을 죽이는 마녀를 되돌리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얘기가 깁니다, 만싸. 하지만 당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결은 다시 잠시 고개를 돌려 만싸를 바라보았다. 만싸가 벽을 짚고 서 있는 것이 미심쩍었지만, 한결은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이 이 안에 있는 이상, 만싸는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 한결은 다시 시선을 되돌린 뒤, 손을 뻗어 마녀의 물건에 손을 대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 공간 안에 두 번째로 들어오는 사람은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완벽한 방어. 그것이 마녀의 물건의 비밀이었다. 던져진 물건을 방어할 뿐 아니라, 들어오는 존재 조차도 방어하는 완벽한 방어막. 만싸는 웨인에게 들어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웨인의 아버지가 그렇게 사라졌으니까. 마녀가 그 물건을 갖고 있을 때에는, 마녀 주위에는 어느 누구도 다가올 수 없다는 의미이니까.
“알아. 그리고 그걸 나에게 알려준 사람이…”
한결은 만싸에게 그것을 알려준 그 사람이 웨인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의 말은 상상하지 못했다. 만싸는 벽의 한쪽 편을 꾹 눌렀다. 벽의 일부가 부자연스럽게 쑥 하고 들어갔다.
“…다른 것도 알려줬지.”
갑작스럽게, 한결은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결이 당황하는 사이에, 만싸는 발을 굴러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몸이 가벼워진 덕분이겠지만, 만싸는 거의 방 천장에 가까운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한결은 그제서야 이 방의 천장이 지금까지의 복도나 다른 방과는 다르게 꽤 높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한결이 느끼는 무게는 점점 더 가벼워졌고, 결국 한결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한결은 만싸가 천장 근처에서 “머무르며”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결은, 만싸가 물구나무를 선 것 처럼 천장 가까이에서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결의 머릿속에서 뭔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결은 다급하게 웨인이 쳐 놓은 테두리를 바라보았다. 테두리를 쳐 둔 줄은 느슨했고, 처음에는 아랫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조금씩 떠오르더니, 이제 윗쪽 방향으로 조금씩 “늘어뜨려지기” 시작했다.
방의 위 아래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한결은 허우적대었지만, 이미 몸이 떠오른 뒤였다. 그리고 머리부터 윗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만싸가 천장에 천천히 발을 디딘 채로 몸을 안정시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결은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리고 만싸가 있는 방향을 노려 벽을 강하게 밀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갑작스럽게 무게가 느껴지며, 그는 천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큰 나무의 꼭대기 정도의 높이에서, 한결은 만싸에게 떨어져내려-올라-갔다.
당연히 마녀의 물건의 영향력은 원구형이었다. 물건의 능력을 알고 있는 웨인으로서는, 누군가가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마녀의 물건을 상당히 높은 곳에 두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늘 마녀의 물건을 체크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높이는 위험하다. 웨인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을 때 아랫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바닥을 파내는 것도 고려해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바닥을 파냈다면, 의외의 배신이 일어났을 때 감당할 수가 없다. 절벽에서 등을 떠미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웨인은, 천장을 높이 파고, 필요에 따라 방의 위 아래를 뒤집어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위 아래가 뒤집힌 뒤에는 어느 누구도 마녀의 물건에 접근할 수 없다. 암벽등반을 할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웨인은 마녀의 물건의 영향력의 범위를 끈으로 표시했다. 바닥에 그냥 선을 그렸어도 충분했지만 막대를 바닥에 고정하고 느슨하게 끈을 매달아 둔 이유는 이것이었다. 방 밖에서 방 안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것. 끈이 위로 솟아 있으면 방 안은 “거꾸로”이고, 따라서 무심코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만싸는 웨인의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마녀의 물건은 완벽하다. 에트나 님이 그것을 어떻게 마녀에게서 빼앗았는지가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을 밖으로 빼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러나 만싸는 자신을 노려 떨어지는 한결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만싸는 ‘그냥 구식 그물 함정이 더 낫겠다!’ 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질렀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무게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결은 저기서 거꾸로 떨어져 중상을 입었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한결은 미리 천장에서 자세를 잡고 있던 만싸를 이겨낼 수 없을 터였다. 만싸는 한결의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는 것에 -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일인데도 - 짜증내며 떨어지는 한결을 피해 몸을 억지로 날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대응이 조금 늦었다. 결국 둘은 함께 방 천장을 뒹굴었다.
——
에트나는 마물을 쓰러뜨렸다. 마물의 두꺼운 가죽과 덩치 때문에 쓰러뜨리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리 큰 호수라도 계속 메우면 결국 평지가 되는 법이다. 마물을 상대하면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것은, 에트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트나는 허리에 찬 칼집에 칼을 꽂아넣었다.
에트나는 쓰러진 마물을 뒤로 하고 세계수 광장을 향했다. 그러나 보통이라면 정확한 상황이 절대 보이지 않을 거리에서, 에트나의 눈에 꽁꽁 묶여서 세계수 옆에 버려진 웨인의 모습이 정확히 들어왔다. 에트나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광장 초입부에 도착하자마자, 에트나는 하루츠와 맞닥뜨렸다.
“…하루츠.”
“에트나 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루츠는 왼쪽 허리에 칼집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오른손을 칼의 손잡이에 대고 있었다. 에트나는 하루츠의 모습에서, 하루츠가 “뭔가를 물어보기만 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에트나에게도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다.”
에트나는 간단히 대답하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하루츠는 신경쓰지 않고 질문했다.
“제가 저주에 걸리게 된 것은 에트나 님 때문입니까?”
에트나는 움직이려던 그 상태 그대로 멈추어섰다. 에트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하루츠는 다시 질문했다.
“원망하던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에트나 님 때문입니까?”
에트나는 이번에도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츠는, 여전히 대답을 들은 것처럼, 혹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을 아는 것처럼 다시 질문했다.
“에트나 님도 거짓말을 합니까?”
요정이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트나는 그것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에트나는, 스스로가 하루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서 동시에 거짓을 말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루츠는 조금 입맛을 다신 뒤에 얘기를 이었다.
“에트나 님이 죽으면 마녀를 봉인한 것이 풀리게 되어 마녀가 다시 깨어나게 되지요.”
에트나는 허리에 차고 있는 칼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하루츠는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큐가 한 가지 더 재밌는 얘기를 해주더군요. 제가 죽으면 마녀의 저주가 저에게서 에트나 님에게로 넘어가서 에트나 님이 마력을 잃고, 그래서 결국은 마녀가 깨어나게 될 거라고.”
그 얘기를 듣고 나자, 에트나는 더 이상, 웨인이 처해 있는 상황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루츠는 시선을 돌려 저 쪽 멀리에 쓰러져 있는 마물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보기에도 거대한 마물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죽어있었다.
“에트나 님은 강하시지요. 보통이라면 저 같은 보통 ‘인간’은 상대할 수 없지요.”
만싸의 칼 손잡이는 잘 다듬어진 가죽으로 알맞게 감겨 있어서 손에 꼭 맞았다. 만싸는 하루츠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하루츠는 이제 마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에겐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하나 남아 있는 것은, 에트나를 죽이게 되면 마녀의 봉인과 함께, 자신에게 걸린 ‘에트나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저주’ 까지도 함께 풀릴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루츠는 싱긋 웃었다. 하루츠의 말투가 바뀌었다.
“하지만, 네가 날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싸움을 피할수도 없다면 얘기가 다르겠지?”
하루츠는 칼 손잡이에 두었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칼을 뽑아라, 에트나!”
결국 에트나는 칼을 뽑았다. 하루츠도 강하게 힘을 주어 칼을 칼집에서 뽑아내었다.
“우드득!”
그러나 뭉툭한 소리가 나며 칼집을 묶어두었던 끈이 끊어졌다. 하루츠는 칼집 째 끌어올려진 칼을 보고 멍해졌다. 그리고 왼손으로 칼집을 잡고 오른손으로 다시 칼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만싸의 칼은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하루츠는 칼집에 뭔가 다른 잠금 장치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다. 칼은 칼집에 느슨하게 꽂힌 채 덜렁거렸지만, 정작 칼집을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만싸는 마지막으로 하루츠의 도끼를 가져가고 자신의 칼을 칼집에 넣은 채로 돌려주었다. 그 때에도 만싸는 칼에 어떤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루츠는 방금 전에 있었던 히비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뭐, 쓸 일은 없을 테니까.’
히비스는 뛰어난 마법 부여사이다. 만싸에게 준 칼에도 뭔가 다른 마법을 부여해 두었을 것이다. 하루츠는 만싸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하루츠는 칼집에서 히비스 특유의 문장과 묘한 요정의 표식을 발견했다. 만약 그것이, “만싸가 아닌 사람이 칼을 뽑을 수 없는 안전장치”라면?
“만싸아아아아아!!!!!”
하루츠는 칼을 움켜쥔 채로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힘을 줘도 칼은 칼집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만싸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하루츠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쓸 수도 없는 칼을 쥐어준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하루츠가 에트나를 공격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에트나는 잠시 하루츠의 상태를 바라보다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넣었다. 하루츠가 정신을 차리고 에트나를 바라보았을 때, 이미 에트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없어진 뒤였다. 하루츠가 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에트나는 하루츠를 지나쳐 세계수 광장 쪽으로 달려 가고 있었다.
에트나를 놓쳐선 안 되었다. 하루츠는 칼집에서 빠지지 않는 만싸의 칼을 든 채로 에트나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에트나의 빠름은 하루츠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츠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날 상대하지 않는다면 자살할 수도 있어!”
하루츠는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하루츠는 에트나에게 들렸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에트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만약 에트나가 이대로 사람들 틈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이용해 하루츠를 무력화시키기로 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엔 하루츠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죽어서는 안 되지만, 살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에트나는 “마녀를 봉인한다”고 하는 대의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벌일 것이다. 하루츠는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하루츠는 에트나의 걸음이 빠르게 느려지다가, 결국 자리에 멈춘 것을 보고 오히려 의아해졌다. 에트나가 충분히 사정거리에 - 칼은 아직 뽑지 못하였지만 - 들어간 것을 확인한 하루츠도 발을 멈췄다. 하루츠의 발소리를 틀림없이 들었을 에트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하루츠를 바라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결국 하루츠도 에트나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고 에트나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세계수 구조물 안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아마도 마지막 사람이 나온 듯, 구조물의 입구 문이 쾅 하고 닫기며, 구조물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슬슬 의아해할 때 쯤, 문을 열고 한결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한 명의 소녀가 안에서 걸어나왔다.
소녀는 풍성한 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팔꿈치 근처까지 올라오는 검은 장갑을 꼈으며, 목에는 반짝이는 검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소녀는 공기 중의 냄새를 맡으려는 듯 잠시 작게 킁킁거렸고, 곧 얼굴 가득 미소를 띄며 기쁘게 한결을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는 듯 했다. 한결은 그녀에게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녀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마녀는 싱긋이 웃으며 우아하게 치마를 잡고 몸을 숙여 보였다. 세계수 지하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은 광장 한 쪽 편에 모여 있었다. 몇 몇 용기 있는 사람들과, 무기를 든 사람들이 그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마물들의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외곽편에 있을 터였다. 그들 중 몇몇이 한결을 알아보고 이를 갈았다.
“한결!”
한결은 그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입구 근처에 묶여서 자신과 마녀를 노려보고 있는 웨인도 무시했다. 한결은 마녀의 앞을 막아선 무기를 든 사람들 중에, 웨인이 갖고 있던 장대를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다만, 마녀는 그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마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에 에트나가 있었다.
“안녕, 오빠.”
“마녀.”
“…내 이름, 아직 기억해요?”
에트나는 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매력.”
마녀, 매력 또한 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빠와 동생이라는 호칭에 놀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매력은 웃었다.
“섣부른 짓 하지 마라! 이 마녀!”
매력은 소리치는 마을 사람을 잠깐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마녀!”
에트나의 옆을 스쳐, 하루츠가 매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에트나가 빠르게 낚아채었다. 에트나는 하루츠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하루츠는 한 손에는 빠지지 않는 칼을 든 채로 바둥거렸지만, 에트나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녀!!! 내 저주를 풀어! 당장!”
매력은 잠시 하루츠를 바라보다, 뭔가를 깨달은 듯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내 마법을 뒤집어썼군요!”
매력은 그러나, 저주를 풀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매력은 자신을 향한 하루츠의 적대적인 시선을 조금 살펴보고, 눈을 찌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트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오빠는 결국 모든 걸 알고 있었군요?”
“세상엔 그것이 필요하다.”
에트나는 이를 악물었다. 매력은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