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마을의 하루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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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츠의 집에 먼저 도착한 큐는 뒤를 돌아보고 하루츠와 만싸가 무사히 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집 문을 두들겼다.
“하루츠냐?!”
문이 벌컥 열리며 하루츠네 아버지가 나왔다. 하지만 그는 문을 두들긴 것이 큐라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찌푸렸다. 큐는 손가락으로 하루츠가 달려오는 것을 가리켰다. 달려오고 있는 하루츠가 무사한 것을 보고 난 뒤에야 하루츠 아버지의 표정이 꽤 온화하게 바뀌었다.
만싸는 그것을 보고 방금 전에 떠올린 생각을 확신했다. 자신이 위험에 처한 아주머니를 구해내면서 듣게 된 이야기, 하루츠네 아버지가 하루츠를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큐는 하루츠네 아버지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루츠를 데려와야 했다. 그래서 비상금이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면서 하루츠를 끌고 가려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만싸가 하루츠를 바라보았으나, 하루츠는 별다른 표현도 없이 아버지를 무시했다. 하루츠의 반응과 상관 없이, 하루츠네 아버지는 무기로 쓸 만한 농기구 하나와 손도끼 하나를 챙겨들고 집을 나왔다.
만싸는 하루츠 아버지를 데려가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큐가 아니었다면 하루츠네 아버지는 고집을 부려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큰 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싸는 큐의 사려깊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싸가 큐가 방금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 큐는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고개를 돌려 찾아보니, 큐는 하루츠 집의 벽에 가까이 붙어 쭈그려 앉아 있었다. 큐가 아랫쪽 받침돌 하나를 살살 움직이더니, 그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큐는 그 안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주머니를 안쪽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 광경을 보고 벙찐 만싸가 일어서서 다가오는 큐에게 물었다.
“…진짜였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 형은 거짓말 안 한다.”
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만싸의 머릿속엔 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잠깐, 설마 우리 집에도 비상금 숨겨 놨냐?”
큐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느낌의,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만싸를 바라보았다.
“형이 아우 집에 이상한 거 숨기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나?”
‘실제로 숨겼잖아.’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만싸는 큐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여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만싸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데.”
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직은 괜찮겠군.”
“…뭐가!?”
큐는 만싸의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루츠네 아버지에게서 손도끼를 받아들었다. 그 때였다.
“크르르르…”
동물의 낮은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츠네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고 농기구를 움켜쥐고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러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한 둘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마자, 그는 모두에게 낮게 말했다.
“셋을 세면, 바로 세계수로 뛴다.”
만싸 역시 셋 이상일 경우엔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나, 둘, 셋.”
모두는 신호에 맞춰 바로 달음박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십 수 초가 지나지 않아서, 만싸는 뭔가가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 달려! 돌아볼 정신이 있으면 더 빨리 달려라!”
하루츠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왔고, 결국 만싸는 돌아볼 생각조차 않고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꽤 필사적인 질주 끝에, 만싸는 세계수 광장이 보이는 근처까지 무사히 달릴 수 있었다. 한숨 돌리게 된 만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는 마물은 없었지만, 만싸는 뭔가가 더 부족한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만싸는 하루츠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하루츠! 네 아버지는!?”
“……”
하루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세계수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만싸는 하루츠의 팔을 잡아 세웠다.
“놔!”
“뭐 하는 거야!? 아저씨는 어디에 계셔?!”
만싸가 날카롭게 캐묻자, 하루츠는 눈에 힘을 주고 소리질렀다.
“아빠가 마녀한테 무슨 죄를 지었던 간에 그 죄를 받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만싸가 버럭하고 화를 내자, 하루츠는 만싸의 손을 뿌리쳤다. 큐는 둘 사이로 끼어들어가 둘을 말려 세우고는 만싸를 바라보고 말했다.
“만싸. 지금은 넘어간다.”
“뭐야 그게?! 아저씨는?!”
“만싸! 지금은 세계수로 가야 해!”
큐는 만싸를 노려봤다. 만싸 또한 큐를 마주 노려봤다. 그러나 하루츠가 다시금 세계수로 달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만싸도 그를 따라 뛸 수 밖에 없었다. 큐는 그런 둘을 따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곧 끝났다. 셋이 무사히 세계수 광장에 도착했을 때, 만싸는 하루츠를 붙잡으려 했다. 큐는 그런 만싸를 다시금 막아세웠다.
“형이 네게 할 얘기가 있다.”
“미안. 난 하루츠에게 할 얘기가 있어.”
“그 전에 들어야 할 얘기다. ‘오해는 때에 따라선 도움이 된다’.”
만싸는 주먹을 움켜쥐고 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큐가 생각이 깊다는 것을 겨우 다시 되새겼다. 큐가 그러한 행동을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싸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를, 숨가쁜 상황에서 억지로 생각했다.
하루츠 아버지는 하루츠를 살리기 위해 도중에 남으셨을 것이다. 당연히 “계속 달리”라고 말한 시점 이후일 것이다. 그것을 하루츠도 어느 시점에선가 눈치채었다. 하지만 하루츠가 그런 아버지를 말리지 않은 것은, 하루츠의 아버지가 지은 “죄” 때문에 마녀의 저주가 하루츠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만싸는 그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만약 그걸 알게 되면 하루츠는 아버지를 구하러 갈 것인가? 그럼 하루츠는 죽고 마녀는 풀려난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하루츠는 단지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둔” 것에 대해 자책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만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이미 늦은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루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시점에서, 그것을 알리는 행위는 실제로 어떤 이득도 주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더더욱 좋지 않다.
“…알았어.”
“말 잘 듣는 동생이로군.”
하루츠는 그대로 걸어가 벤치에 주저앉았다. 웨인의 지하실 통로가 보이는 그 벤치였다. 세계수 광장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지만, 그럭저럭 광장 내부였고, 어지간해서는 안전할 터였다. 하루츠는 웨인이 그 “검은 장대”를 들고 입구를 막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살아남아라.”
아버지가 조용히 내뱉듯 한 말이었다. 들으라고 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루츠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아버지 같으니. 마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지만 가족 전체를 망쳐버린 썩을 인간.
만싸는 그런 하루츠를 잠깐 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만싸는 저 쪽에 한결과 서내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큐 역시도 만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결과 서내는 다가오는 만싸를 보고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다만, 만싸는 그들의 표정이 “단지 기뻐하는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싸형!”
“만싸!”
나이대는 비슷하지만 한결은 만싸를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렀다.
“다들 무사해? ..애나는?”
만싸의 질문에 한결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돼요. 애나는 다고담이 걱정되어 찾으러 갔어요. 다고담은 자기 소설을 가지러 집에 갔구요.”
“뭐!?”
만싸가 낮게 소리지르자, 서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한결이 할매에게서 애나 레이피어를 받아왔었거든! 애나가 그걸 보고는 빼앗아서 갖고 가 버렸어! 다고담을 구하겠다고!”
“다고담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 것 같지만 너무 무모해요! 위험할 수도 있다구요!”
만싸는 눈을 찡그리고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작게 기묘한 비명소리를 냈다. 짧은 시간이 지난 뒤, 만싸는 머리를 정리하며 조용히 내뱉었다.
“큐, 가자. 그 애들을 구해야 해.”
“아니. 형은 가지 않는다.”
만싸는 조금 놀라 큐를 바라보았다. 큐가 조금 전에 “하루츠 아버지”와 “비상금”을 위해 움직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큐는 만싸의 시선에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고, 만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세계수 광장을 홀로 빠져나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만싸가 달려가는 것을 보던 큐는 고개를 돌려 한결을 바라보았다. 한결 역시 만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큐가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한결은 큐를 돌아보았다. 큐는 한결에게 조금 다가가서는, 발로 한결을 걷어찼다.
“우왓!?”
한결은 급히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큐의 발을 막았다. 서내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으나, 한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는 지금 상황이 한결과 큐가 대치하고 있는 것 같은 식으로 보였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한결에게, 큐는 담담하게 물었다.
“왜 애나에게 레이피어를 주었지?”
큐는 담담하게 물었다. 한결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뺏긴 거에요!”
“애나가 달려드는 걸 막지 못할 네가 아닐텐데.”
“너무 갑자기 달려들어서..”
큐는 웃었다.
“내가 좀 덜 갑자기 걷어찼나보군.”
큐는 차고 있던 손도끼를 들어올렸다. 기세가 흉흉한 것이, 마치 한결을 바로 내리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서내는 놀라 큐를 끌어안아 붙들었다.
“큐! 뭐 하는 거야!!”
“비켜. 이 놈은 뭔가를 꾸미고 있다.”
“한결! 도망쳐! 큐가 미쳤나봐!”
한결은 주춤주춤 물러서다, 서내가 막아서는 틈을 타서 몸을 돌려 도망쳤다. 큐는 눈을 찌푸리고는 자신의 오른손을 억지로 막고 있는 서내의 손을 뿌리치고 도끼를 다시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서내는 그제서야 큐를 놓아주고는 눈을 부라렸다.
“지금 뭐 하자는거야! 오빠 애나 사랑해!?”
“…너 사랑이 뭔지 알고 있기는 하는거냐?”
큐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한결이 뛰어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큐가 그를 곧 다시 잡으러 갈 기세라서 서내는 긴장했으나, 큐는 그 대신 서내에게 물었다.
“넌 그 레이피어가 어떻게 애나 것인 줄 알았지?”
“…한결이 알려줬어.”
“애나는 레이피어 쓰는 법은 알아?”
“…그것도 한결이 알려줬…”
“알려줬다면 레이피어를 빼앗을 기회는 있었겠군.”
서내는 멍해졌다. 당시엔 너무 경황이 없었지만, 한결은 실제로 애나에게서 레이피어를 돌려받아 다루는 법을 간단히 알려줬다. 그리고 그것이 ‘원래 애나의 것’이었으니 다시 애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과 같은 위험한 상황에?
“할매가 이런 상황에 애나에게 ‘그 레이피어’를 줬을 리가 없다. 애나의 성격을 아니까. 그건 한결이 준 거다.”
큐는 멍해진 서내를 바라보고 말했다.
“한결이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일일 가능성은 적다. 아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 거니까. 일단 막는 것이 먼저다.”
큐는 세계수 광장 중심부 가까이에 있는 아는 어른들에게 서내를 부탁했다. 어른들은 맛있는 빵집의 서내를 알아보고는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것을 약속했다. 큐는 그대로 몸을 돌려, 한결을 찾아나섰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던 큐에게, 하루츠와 함께 있는 한결이 보였다. 큐는 눈을 찌푸리고 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결은 다가오는 큐를 보았고, 큐를 가리키며 하루츠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하루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큐에게 달려와 큐를 붙잡고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내 저주가 어떻게 된 거야!? 얘기해!”
큐는 이를 악물었다. 하루츠는 큐가 그를 스쳐 지나가 한결에게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한결은 조금씩 움직이더니, 다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한결의 흔적을 다시 놓친 큐는 하루츠를 노려보았다.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니 나중에 번호표 받고 다시 와라.”
“개소리 그만해! 농담으로 받아줄 수 있는 얘기가 있고 없는 얘기가 있어! 내 저주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면서!”
그 때였다. 크르르르, 하는 낮은 으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쿵쿵거리는 진동음이 들리고, 땅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둘의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함께 돌아갔다.
온 몸이 검고 털이 난, 키가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 되는, 소 머리를 한 기괴한 마물이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나타났다.
“…세계수 쪽으로 도망치자.”
“…도망친 뒤에 바로 물어볼 거다!”
둘은 급히 세계수 방향으로 뛰었다. 근방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세계수 중심을 향해 몰려갔다. 마물은 몽둥이를 휘둘렀고, 몽둥이는 광장 근처의 집을 때렸다. 집을 이루던 돌과 나무들이 날아가 광장을 덮쳤다. 사람들이 이미 대피한 곳에 파편이 떨어졌고, 운이 좋게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일부 파편은 세계수 구조물에 부딪혔고, 사람들은 광장 내의 어느 곳도 “완벽히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트나 님!”
도망치던 사람들이 동시에 멈춰서서 외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았다.
에트나가 홀로 칼을 들고, 그 커다란 마물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