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마을의 하루 - 4

in #novel9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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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는 여러 개의 무기를 들고서 자신의 대장간을 뛰쳐나왔다. 비명 소리와 외침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거리에 나와 있는 상태였다. 군데 군데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거리는 꽤 밝았다. 몇몇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할매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힘 좀 쓰는 놈들 썩 튀어나와! 내 물건 공짜로 써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할매!”

사람들이 할매를 보고 빠르게 달려왔다. 할매는 누군지 하나 하나 확인하고 그에 걸맞는 무기를 하나씩 넘겨줬다. 그 중에는 한결도 있었다. 할매는 한결을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결, 넌 싸우기엔 너무 어려. 세계수 광장으로 가라.”

“…그러지요.”

한결은 잠자코 할매가 시키는 대로 세계수 광장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할매는 한결을 그냥 보내지 않고, 손에 무기집에 들어 있는 무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꽤 잘 장식된 레이피어였다. 한결은 레이피어의 손잡이 부분에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요정 사슬 장식이 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쓸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가는 와중에 위험해지면 사용해봐도 괜찮다. 혹시나 모르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애나 꺼다. 비밀이니까 가르쳐 주진 말고.”

“그렇군요. 그렇단 얘긴, 지금 애나에게 주진 말라는 거죠?”

“그래. 애먼 놈 찔리는 일 생길라.”

한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레이피어를 무기집에서 꺼내 두어 번 휘둘러 보았다. 괜찮은 균형감이었다. 한결은 레이피어를 허리춤에 묶고 발을 돌려 세계수 광장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기를 하나씩 받고, 여럿이서 모여서 마물이 나왔다고 하는 쪽으로 가 버렸다.

세계수 광장은 마물이 쳐들어오게 될 경우 대피소 역할을 한다. 세계수가 없는 지역에서는 대체로 “튼튼한 건물” 을 짓기 마련이지만, 세계수가 있을 경우엔 그럴 필요가 없다. 세계수 자체가 마물을 상대로 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마물은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고통을 느끼며, 강제로 세계수와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경우 약한 마물의 경우 심지어 기절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세계수에 옹기종기 모여있기만 해도, 마물들은 그 사람들을 외면하고 음식이나 가축을 노려 잡아먹기만 한다.

물론 마물이 뭔가를 던지거나, 마물이 무너뜨린 건물 파편에 의해 사람들이 다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세계수 광장은 상당히 넓다. 대개의 경우, 마물이 접근 가능한 거리에서 뭔가를 던지거나, 내뱉더라도 날아가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그것이 광장 한 가운데까지 날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다. 달려들어 물거나 할퀴는 것이 대부분인 마물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는 데에는 “접근할 수 없는 거리” 만큼 효과적인 방어벽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은 마물이 습격할 경우 세계수 광장에 모이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는 편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은 여럿이서 모여 마을을 덮친 마물들을 각개격파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수 십 명이 함께 뭉칠 때도 있다. 그 중에 다치는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세계수 광장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한다. 그것이 마물에 대처하는 기본적인 전략이다.

한결이 세계수 광장에 도착했을 때에, 한결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계수 광장에 모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광장 한 가운데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마찰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한결은 광장 한복판으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한결은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저 쪽 편에서 함께 있는 서내와 애나를 발견했지만, 한결은 일단 그들을 무시한 채 광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광장 한 가운데 가까이 도착한 한결은,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는 웨인을 발견했다. 웨인은 검은 색의 긴 장대를 들고 사람들과 대치중이었다.

“어떤 이유라도 들어갈 수 없다.”

한결은 웨인의 마지막 말 만을 들었지만, 무슨 일인지 거의 단번에 이해했다. 사람들은 마물의 위협을 피해 웨인이 만들어둔 지하실에 피하길 바라는 듯 했고, 웨인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화를 내는 듯 했지만, 어차피 마물이 세계수 광장 안쪽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짜증을 내는 정도에서 사태가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한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내와 애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둘은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듯 보였다. 거리가 좀 가까워지자, 한결은 둘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괜찮아?”

“한결!”

애나는 한결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겨우 한결을 발견한 모양이다. 애나는 다급하게 달려와서 한결을 질질 끌고 서내 쪽으로 가까이 데려왔다. 뭔가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이어서, 한결은 그러려니 하고 따라갔다. 서내는 한결이 오는 것을 보고 다급히 한결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는 손짓을 했다. 한결이 몸을 숙이자, 서내가 속삭였다.

“다고담이 자기 집으로 갔어!”

“..뭐읍!?”

무심코 한결이 목소리를 높일 뻔 하자, 서내와 애나가 급히 한결의 입을 막았다. 곧 한결이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서내와 애나가 말을 시작했다.

“그 녀석, 자기 소설 정리한 게 창고 안에 있는데 창고가 불탈까봐!”

“어떡하지 한결!? 어떡해!?”

안절부절 못하는 둘에게, 한결은 가만히 입에 손을 대고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물은 창고에 있는 가축들을 노릴 때도 있어. 그럴 때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냥 창고를 불질러 버리는 게 정답이지. 실제로도 두어 번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럼 어떻게 해!”

애나의 낮은 비명소리를 무시한 채, 한결은 서내를 바라보았다.

“여기 다고담이 한 번 왔었어?”

한결이 묻자, 서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까 전까지 저쪽에 가족들이랑 같이 있었는데, 우리랑 같이 있겠다고 우리 쪽으로 왔어. 그리고나서 우리에게 적당히 화장실 갔다고 핑계 대 달라고 하고 몰래 뛰어갔어.”

한결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기 왔었으니, 사람들에게 ‘다고담이 아직 못 빠져나왔다’ 고 얘기를 전할 수는 없고. 거기에 다고담이 창고에 돌아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 다른 분들에게 따로 부탁할 수도 없어. 다고담이 무사히 창고에 도착해서 소설을 챙겨 나오더라도, 다고담의 집은 꽤 외곽이니까 마물과 마주칠 가능성도 있어. 순찰하는 사람들도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훑을 테니까 그 동안 다고담은 위험할 가능성이 있군.”

“그럼 어떻게 해!”

애나는 다시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기다릴 수 밖에 없어.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해.”

“말도 안돼! 한 명 보단 두 명이 더 안전할꺼야!”

“그렇겠지만, 여기 우리가 모여있지 않고 사라지면 다고담네 부모님이 의심할껄? 다고담을 찾으러 온다면 그게 더 문제 아냐?”

“겁쟁이!”

애나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러다가, 애나는 한결의 허리에 매여 있는 레이피어를 발견했다. 애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를 악물고 한결에게 달려들어 허리에 대충 묶여 있는 레이피어를 빼앗았다.

“애나, 애나!”

“시끄러! 겁쟁이 한결! 내가 구하러 갈 꺼야!”

한결은 한숨을 쉬고, 애나에게 말했다.

“사람들에겐 내가 적당히 둘러대 줄 테니까 빨리 다녀와. 그리고 그거, 내가 보기엔 히비스랑 할매가 너 주려고 준비한 거다. 조심해서 다루고.”

“에? 진짜!?”

한결은 놀라는 애나에게 “쉿”소리를 내 준 뒤에, 다시 레이피어를 돌려받아 몇 가지 동작을 급히 가르쳐 주었다. 팔을 몸 쪽으로 당긴 뒤에 마물이 달려들기를 기다려 내지르는 간단한 요령을 몇 번 가르쳐 주자, 애나는 몇 번을 레이피어를 허공에 찔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레이피어를 들고 다고담 네 집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한결은 서내와 함께 애나가 달려가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만싸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골목을 지나 거리로 나서자, 거리 바로 맞은편에 주저앉아 뒤로 물러나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과, 그걸 노려보는 늑대처럼 생긴 검은 마물 하나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아주머니에게 달려들 것 같았기에, 만싸는 소리를 지르며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마물은 만싸 쪽을 바라보았다. 마물은 무방비한 아주머니보다는 칼을 들고 달려오는 만싸를 더 위험하다고 파악한 듯, 일단 만싸가 달려오는 반대 방향으로 풀쩍 뛰어 만싸와의 거리를 벌렸다. 만싸는 아주머니가 안전해진 것에 잠시나마 안도했지만, 마물은 아주 잠깐 아주머니를 경계한 뒤, 이제는 바로 만싸에게 달려들었다.

“우왓!”

마물은 생각보다 날렵했다. 하지만 마물은 만싸를 향해 “뛰어올랐”고, 만싸는 거의 본능에 가깝게 칼을 휘둘렀다. 다행이었던 것은 만싸가 막바지에 연습하던 과정이, “움직이는 나무토막을 후려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무토막을 몇 개 더 매달기가 슬슬 귀찮았던 나머지, 처음에 후려친 나무토막을 다시 후려치는 식으로 요령을 피운 것이었지만 그것이 거꾸로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우연찮게 자신을 향해 흔들리던 나무토막을 얼떨결에 때렸던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캥!”

칼에 정면으로 부딪힌 마물은 늑대 혹은 여우 비슷한 미묘한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만싸는 나무토막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손아귀가 아파옴을 느꼈다. 만싸는 머릿속으로, “더 무거운 나무토막을 쓸 것” 이라는 조언을 추가하고는 마물이 완전히 죽었거나, 혹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길 바라면서 마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물은 검은 피 같은 것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만싸를 슬금슬금 경계하면서 저 쪽으로 가 버렸다.

만싸는 마물이 골목을 통해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잠시동안 칼을 쥐고 그대로 경계를 하고 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숨을 내쉬었다.

“후아.”

만싸는 실제로 마물과 싸우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은 더 강하게 쥐고 휘둘러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칼을 그대로 놓칠 뻔 했다. 다행히 칼을 휘두르는 것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그대로 마물에게 덮쳐질 뻔 했다. 자신의 실전 경험 부족이 절실히 와닿는 시점이었다. 만싸는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를 보았다. 아주머니는 덜덜 떨고 있었으나, 겨우 정신을 차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만싸는 아주머니에게 서둘러 세계수 쪽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그 전에 만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하루츠를 봤니? 하루츠 아버지가 하루츠와 함께 도망쳐야 한다고 집에서 한사코 기다리고 있단다! 대피하라고 해도 듣질 않아!”

“제가 데리고 갈께요! 걱정 말고 어서 가세요!”

만싸는 아주머니가 세계수 방향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몸을 돌려 하루츠네 집으로 향했다. 하루츠네 집은 옆 거리에 있었고, 위치상으로는 세계수에서 좀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조금 더 가야 했다. 만싸는 하루츠네 집을 향해서 뛰어가다 골목 안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또다른 마물일 것으로 생각한 만싸가 칼을 다시 움켜쥐고 골목에 도착해서 본 것은, 싸우고 있는 큐와 하루츠였다. 만싸는 어이가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둘 다?! 지금 같은 상황에!”

큐는 주먹과 손목을 풀면서 여유를 부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형의 말을 듣지 않는 아우에게 훈계를 하고 있다.”

다만, 하루츠의 증언은 꽤 달랐다.

“미친 소리를 하길래 두들겨 패 주고 있는 중이야.”

만싸는 꽤 다른 두 가지 설명 모두 ‘정말로’ 맞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큐는 주먹을 풀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루츠는 단 한 대도 맞은 것 같지 않았고, 다만 옷이 좀 늘어나 있을 뿐이다. 대신 큐는 입 옆에 피가 나고 흙이 묻어있는 등 꽤 엉망인 상태였다. 만싸는 이마를 조금 짚은 뒤에 말했다.

“시끄럽고 당장 세계수로 가, 둘 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세계수로 가야 한다고!”

아무래도 하루츠는 세계수로 가야 한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큐가 당당하게 반대했다.

“천만에. 형은 네 집에 숨겨둔 비상금을 가져가야만 해!”

“비상금을 왜 우리 집에 숨겼는데!?”

“역시 예상 못했군. 그게 바로 비상금을 숨기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의미지.”

큐는 하루츠의 손을 잡고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려 했다. 방향으로 보니 하루츠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그럼 네 멋대로 가! 왜 나를 끌고 가!”

“집 주인도 없는데 멋대로 가서 비상금을 가져오면 훔쳐가는 것 같잖아?”

“그러니까 왜 비상금을 우리 집에 숨겼냐고!?”

불과 몇 마디 밖에 듣지 않았지만 만싸는 왜 이들이 싸우는 - 정확히는 큐가 얻어맞는 - 상황까지 왔는지를 이해했다. 하루츠는 세계수로 갈 것을, 큐는 하루츠의 집에 갈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하루츠는 세계수로 가려고 했는데, 정작 큐가 하루츠를 보내지 않고 함께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만싸가 정리했다.

“좋아, 좋아. 하루츠 네 집에 잠깐 들려서 비상금 들고 바로 가자. 셋이면 마물이 덤벼도 어떻게 될꺼야.”

“물론이지. 형의 비상금을 생각해주는 너희의 마음이 고마우니 간식거리 하나 정도는 사 주마.”

큐는 당당하게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츠는 이를 갈면서 뒤를 따랐다. 만싸는 하루츠에게 아버지가 아직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가게 되면 알 수 있기 때문에, 만싸는 다만 발을 빨리 놀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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