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마을의 하루 - 1

in #novel9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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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마을 한 가운데에는 세계수가 있다.

애초에 그 나무가 세계수라고 할 만한 근거는 별로 없었다. 딱히 거기에 누군가 위대한 존재가 이름을 적어 두었던 것도 아니거니와, 뭔가 거대한 생명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그에 의해 가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마물이 있는 세계에서, 마물이 가능하면 접근하길 꺼려하는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면, 마물을 피해 사는 사람들은 그 나무를 위대하게 부르고 싶은 것이 당연한 일이다. 가끔 마물이 억지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면, 아마 마물의 기준에서 “나쁜 냄새가 나는 나무” 정도일지도 모른다. 다만, 요정들이 그 나무를 세계수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니까 세계수인 것이다. 요정들 역시도 딱히 그 나무가 실제로 세계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은 이름이 “세계수” 라고 하는 요정들도 있는 편이니 그럴 듯 하다.

하지만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가 세계수라면, 대단히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작은 마을에 세계수라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아오고, 사람들은 세계수를 명예롭게 바라보고, 세계의 위대한 왕들이 이 마을을 심심찮게 방문하여,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인거지.”

애나(@2dosk)의 망상을 빠르게 차단한 사람은 건너 테이블에서 철실을 꼬고 있던 히비스(@KIMHIBISCUS)였다. 애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자, 히비스는 고개를 돌려 애나를 바라보면서 -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기가 꼬고 있던 철실을 멈추지 않았다 - 당연한 게 아니냐는 반응으로 대꾸했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의미가 있다는 거야. 여기가 의미있는 장소가 되면 될수록 가지려는 사람이 많아서 위험해질껄?”

“흥. 그 정도도 지키지 못한다면 요정이나 검사는 왜 필요하겠어요.”

애나는 칼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며 가게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애나가 상대하는 가상의 적은 날렵하게 몸을 피하며 애나에게서 도망다니는 것 같았다. 애나는 가상의 칼을 상대의 몸을 노리고 이리 저리 휘둘렀다. 히비스는 그것을 보면서, 애나에게 칼을 선물로 주겠다는 얘기를 미리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칼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은 있니?”

“필요하다면 들 꺼에요.”

애나는 가상의 적과 몇 번 칼을 충돌시키고, 결국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여 해치우고 의기양양하게 히비스를 돌아보았다. 마물을 서른 마리는 무찌른 듯한 그 표정에, 히비스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철실 꼬기를 마무리하여 작은 주머니에 담아 넣었다.

그녀가 비록 잡일하듯 꼬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하고 있던 철실 꼬기는 어지간한 집중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느다란 철의 실을 세 가닥을 모아, 마치 여자아이 머리를 땋듯 꼬아나가는데, 중간 중간 요정의 표식을 의미하는 매듭을 심는다. 당연하지만 손쉬운 일이 아니며, 손재주가 좋은 히비스조차도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끊어지거나 접히는 실수 없이 철실을 꼬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이걸 할매(@yang0067)에게 좀 갖다 줄래?”

애나는 약간 뾰루퉁해졌지만, 히비스가 내미는 다 꼬아낸 철실이 담긴 주머니를 받았다. 이것은 히비스와 할매 - 할머니가 아니라, 이름 - 에게 모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나는 철실이 든 주머니를 눈 높이까지 들어보면서 중얼거렸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걸.”

“칼 손잡이에 그것보다 더 무거운 걸 달게 되면 칼의 중심이 흐트러지니까 그렇습니다, 아가씨.”

중얼거림을 어떻게 들었는지, 문을 열고 들어오던 만싸(@Dr_manpsa)가 대꾸했다. 애나는 만싸의 비꼬는 말투를 듣고 표정이 팍 상해서는, 입술을 베 내밀고는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만싸는 피식 웃고는 히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만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히비스가 신기한 눈빛으로 만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어?”

“아. 할매네 대장간으로 보내는 거죠? 제가 방금 거기서 왔어요.”

“아하.”

히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비스는 만싸가 무엇이든 배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꾸로 말해, 만싸는 무슨 일로 찾아왔을지 맞추는 것이 가장 어려운 사람 중의 하나다. 히비스는 최근까지 만싸가 할매네 대장간에서 칼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만물박사씨.”

“악기 현이 필요해서 왔어요.”

이번엔 악기를 배우고 있는 건가. 히비스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만싸를 바라보았다. 이 엄청나게 산만한 천재는, 무엇이든 배워내고 어떻게든 해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열심히 파 들어가지는 않는다.

“어떤 건데?”

“바이올린이요.”

히비스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실 다발을 몇 개 가지고 나왔다. 히비스는 종이에 번호를 적어서 실 다발마다 하나씩 꼬아 붙여 주었다.

“숫자가 작은 것 부터 왼쪽. 헷갈리지마. 조율은 다영(@darodaro_)에게 가서 해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거야.”

만싸는 돈을 지불하고는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히비스는 싱긋 웃고는 장부에 팔린 것들을 기록했다.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적당히 수습이 되는 원자재 - 이 경우엔 양의 창자 - 만 있다면 어떻게든 되니까.

———-

애나는 상상의 적과 싸우는 상상을 하며, 할매에게 향했다. 할매는 대단한 대장장이였다. 이 마을에서 만들어지는 칼은 대부분 할매가 만드는 것이니까. 가끔은 검사들이 할매에게 무겁고 두꺼운 갑옷을 만들어주길 부탁할 때도 있었다. 애나는 자신도 검사가 된다면, 할매에게 무기를 받아서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무기 가격이 꽤 비싼 편이라, 아는 사람인 것을 빌미로 열심히 가격을 깎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잔심부름도 열심히 해 주는 것이고.

그러나 가는 길에 맛이 아주 좋은 빵집이 있는 것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딜레마였다. 어떻게 사람이 서내(@bcatseon)의 빵집에 들르지 않고 그냥 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그리고,”

“수학적으로?”

“그래, 그거!”

애나는 맞장구를 치고 나서야 빵집 앞에 앉아 있는 한결(@Some_main)을 발견했다. 한결은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말했다.

“빵 맛보러 왔어? 오 분쯤 더 기다리라던데.”

“아아~. 오분이나 기다려야 돼?”

서내는 구워내는 빵 중 일부를 맛보기 용으로 나눠준다. 서내가 구워내는 빵은 항상 대단히 맛이 있어서, 애나는 ‘맛보기는 불필요하다’ 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절대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 맛보기에 의해 가장 많은 행운을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애나 자신이니까. 2등은 하루의 반절 쯤 되는 상당한 시간 동안 여기 가게 앞의 벤치에서 죽치고 있는 한결이고. 3등부터는 상당히 순위가 어지럽다.

물론 대체로 할 일 없이 여기 죽치고 앉아서 이것 저것 구경만 하고 있는 한결을 빵 맛보기 대결에서 이겨내는 능력은 애나의 절묘한 타이밍에 있다. 애나는 내심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애나는 빵집 문을 열고 안쪽으로 소리쳤다.

“서내! 안녕!”

안쪽에서는 서내가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애나! 잘 왔어! 빵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지금쯤 서내는 오븐에서 금방 익어나오는 빵을 꺼내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지금 들어갔다간 방해만 되는 것을 알기에, 애나도 그냥 밖의 벤치에 앉아 있는 한결 옆에 주저앉았다.

“어디 가는 중이었어?”

“응? 심부름. 할매한테. 이거 주러.”

한결은 그렇게 어려보이는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애나가 나이를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고 그냥 “몇 살 처럼 보여?” 라고 돌려묻기만 했고, 그에 화가 난 애나는 “그럼 너 나랑 동갑이야!” 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뜻밖에, 한결이 거리낌없이 동의했기에 그냥 그렇게 하기로 되어 버렸다.

“좀 봐도 돼?”

“그래.”

애나는 한결에게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한결은 끈을 풀어 주머니를 열어보고는, 작게 감탄사를 내었다.

“뭔데 그래?”

“상당히 잘 꼬았네, 이거. 히비스가 만든 거지?”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은 다시 끈을 묶고 주머니를 애나에게 넘겨주었다.

“그거 그냥 실 묶음 아냐?”

“나중에 심심하면 히비스에게 해보겠다고 해봐. 잘 안될껄?”

“지루해, 그런 건.”

한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에 파란 하늘. 가끔 저 쪽 하늘에서는 새가 날고, 멀리 세계수도 보였다.

“빵 다 됐다! 이거 먹어봐!”

서내가 빵이 담긴 그릇을 들고 소리를 앞지를 듯이 매우 후닥닥 뛰어나왔다. 그 증거로, 서내가 외치는 ‘빵이 다 되었다’는 소리의 시작은 틀림없이 주방이었지만, ‘이거 먹어봐’의 끝자락은 문 바로 앞이었다. 애나도 한결도 늘 기다리는 시간이었지만, 서내 역시도 이 시간을 늘 기다려온 것이다. 시식 시간!

빵을 입에 넣고 애나는 행복감에 몸을 떨었다.

“우와! 맛있어!”

“응. 맛있네.”

“에헤헤.”

서내는 애나와 한결의 반응에 기뻐서 싱글벙글이었다. 늘 맛있는 빵을 만들고, 늘 칭찬을 받지만, 항상 칭찬을 받을 때마다 기뻐하는 것이 서내였다.

“앗! 다고담(@dagodam)이다!”

“아!”

빵을 시식하던 애나가 저쪽 골목에서 나타난 소년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감자 포대를 메고 가던 소년은 그 목소리를 듣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고담! 와서 먹고 가!”

서내가 소리치자, 다고담은 조금 머뭇머뭇 하다가 감자 포대를 옆에 세워두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괜찮을까? 매번 미안한데.”

“괜찮아. 괜찮아.”

서내는 빵을 들어 다고담의 입에 넣어 주었다. 감자 포대를 나르고 있었으니 손이 더러울 것이다. 다고담 또한 맛을 느끼며 한참 행복해했다. 그리고 다고담이 맛의 천국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 다고담은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애나와 서내를 발견했다.

“어, 음, 고마워.”

“아냐. 다음 편 언제 나와?”

서내가 질문하고, 애나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으로 다고담을 다그쳤다. 다고담은 머쓱해하며 뒷통수를 긁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고 있다. 다고담이 쓰고 있는 소설의 다음 편을 말하는 것이다.

“어, 미안. 아직 적당한 시간이 없어서…”

“응! 괜찮아! 그래도 쓰면 바로 보여줘야 돼! 빵 먹고 싶으면 줄 테니깐!”

“나도! 나도! 절대 쓰는 거 멈추면 안돼!”

“응,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서내도 애나도 다고담이 쓰는 소설의 팬이었다. 처음 다고담이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애나였고, 내용이 너무도 맘에 드는 나머지 서내에게 소개시켜준 것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다고담은 제발 부모님께 말하지 말라고 거듭 부탁을 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둘은 다음 편이 나오면 가장 먼저 보여준다는 조건으로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다고담은 빵을 적당히 먹고 인사를 나누고 감자 포대를 가지고 가 버렸다. 한결은 골목을 꺾어 사라지는 다고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결 역시 다고담이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한결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제안했다.

“뭣하면, 다고담에게 밀가루나 설탕 포대를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해보지 그래? 그럼 다고담네 부모님도 뭐라고 하진 못할 걸?”

“오! 그럼 결이가 대신 설탕 포대를 나르고 그 시간 동안 다고담이 글을 쓰면 되겠다!”

애나의 아이디어에 서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진짜 좋은 생각이다!”

“악덕 업자 같구나.”

한결은 웃으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설탕 포대를 나르는 자신의 모습이 이미 상상이 되는 바였다. 제안한 사람이 자신인지라, 딱히 반대할 수도 없었다.

———-

만싸는 실을 들고 큐(@Qurious_)의 집으로 향했다. 만싸에게는 바이올린이 없었다. 큐에게서 ‘현이 다 끊어진 바이올린을 찾았다’ 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만싸는 현을 연결해서 연습해 볼 생각이었다.

만싸가 칼에 한창 열을 올리던 당시에, 만싸는 숲 속에서 몇 번인가 칼을 연습한 적이 있었다. 허공에 밧줄로 매어놓은 여러 개의 나무토막을 때리는 것이다. 처음엔 칼이 무거워서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가 생기고 칼을 휘둘러 첫 번째 나무토막을 때리고, 다음 나무토막을 때리는 것 까지의 시간이 짧아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의 나무토막을 때리고, 다시 아직 흔들리고 있는 첫 번째의 나무토막을 때릴 수 있게 될 때 까지 한 달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나무토막을 하나씩 늘려갔다. 만싸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만싸의 칼은 실전에서 아무런 경험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실력이었다.

그 말은 거꾸로, 실력에 비해 실전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되었다. 만싸는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 능력이 필요할 때에 그것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싸는 할 수 있는 것들을 늘려놓아야만 했다. 실전을 겪게 되었을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칼 연습을 하다가 잠시 쉬던 시기에 바람을 타고 귀를 간지럽히는 음악 소리가 있었다. 만싸는 잠시, 바람이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리 묘사를 시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 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의 하나’였던가 하는 망상에 빠졌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나무나 칼 둘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였고, 지금은 둘 다 때려부수고 싶을 정도로 싫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야, 어디선가 누군가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싸는 음악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견하게 된 것이, 다영의 치유 음악대였다. 다영을 포함해서 다섯 명의 요정들이 악기를 갖고 연주를 하고 있었다. 기타와 피리, 첼로 -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 그리고 뭔지 알 수 없는 묘한 악기 두 개가 어우러진 음악 소리는 아름다웠고, 또한 상당히 독특했다. 악기를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였다. 말 그대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큐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큐는 마침 집에 있었다. 한참 전부터 큐는 집 옆에 뭔가를 만드는 듯 하더니, 결국 나무와 흙을 이용해 창고를 만들었다. 큐는 집 안에서 물건을 날라 그 창고로 옮기는 중이었다.

“뭐 하냐?”

“잘 왔다. 형 좀 도와라.”

“아직도 형 타령이냐. 바이올린 안 쓰지? 나 줄래?”

“그래, 잘 왔다. 형 좀 도와라.”

만싸는 한숨을 쉬었고, 그러면서도 팔을 걷었다. 큐는 집의 방 하나를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큰 방은 아니었고, 예전에 창고로 쓰던 방이었다. 안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옮겨주면서, 만싸는 다시 방금 전에 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뭐 하는데.”

“예전에 형이 너한테 서재 갖고 싶다는 얘기 했던가?”

“했던 것 같네. 그래서?”

큐는 마지막 짐을 창고로 옮겨넣으며 얘기했다.

“저 방을 형의 서재로 쓰기로 했다.”

만싸는 그가 짐을 챙겨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알기로, 큐는 “방을 서재로 써야 할 만큼”의 책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 …그래서, 책은?”

“학자님이 좀 주신다더라. 오늘 책 가지러 가려고 한다.”

“그럼 가기 전에 너 예전에 얘기한 그 바이올린 주고 가라.”

큐는 물끄러미 만싸를 바라보았다.

“형이라고 불러봐.”

“…형.”

“그래. 주마.”

큐는 담담하게 그렇게 대답하고서는 신발끈을 고쳐 매고, 만싸의 손을 잡고는 언덕 쪽 길로 이끌었다. 엄연히, 학자가 사는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이다. 만싸는 큐가 자신을 책 나르는 일꾼으로 써먹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가기 전에 주고 가라고 임마.”

“형이 얘기 안 했던가? 학자님에게 책을 가지러 간다고.”

“…그러니까 가기 전에 주고 가라고.”

“형이 얘기 안 했던가? 바이올린이 학자님 서재에 같이 있다고.”

“안 했거든!”

“형이 책 나르는 것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영광으로 알아.”

결국 만싸는 포기하고 그냥 큐를 돕고 바이올린을 받기로 했다. 어차피 현을 걸고 나면, 다영에게 조율을 받아야 하니 마찬가지 일이긴 했다.

“…그럼 그거 니 꺼 아니란 거잖아!?”

“형이 서재에서 책을 받을 때 바이올린처럼 생긴 책도 받을 거다.”

“아니거든!?”

만싸는 투덜대며, 속으로는 바이올린을 받고 나면 절대 돕지 않고 그냥 와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

학자의 오두막은 옆에 서재가 따로 붙어 있는 구조였다.

학자의 오두막에는 처음 보는 사람은 항상 놀라게 되는 엄청난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서재가 오두막 옆에 따로 붙어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방금 큐가 잡동사니를 날랐던 창고와 같은 개념이지만, 상황은 조금 달랐다. 잘 만들어진 나무 창이 있고, 벽을 진흙과 석회로 바르고, 지붕은 잘 만들어진 벽돌을 얹어둔, 굴뚝이 두 개나 있는 커다란 ‘서재’ 옆에, 대충 통나무를 적당히 맞춰 짓고 흙으로 구색을 갖추고 적당히 울타리를 쳐 둔 ‘오두막 집’이 있었다.

다영은 별 생각없이 그냥 그렇게 살고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그 비대칭성에 놀라게 된다. 만싸 역시도 그것을 처음 보고 어리둥절해했지만, 큐가 간단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해 주었다. “그거? 세입자인 책에게 집주인이 쫓겨난 거다.” 만싸는 그 설명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책이 많긴 했지만, 그럴듯한 집 전체가 서재라면 결국 책에 쫓겨나서 집을 새로 지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학자답다고 해야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젠 스멀스멀 늘어나는 책들이 큐의 집으로 전염되기 시작했다는 건가?’

자칫 잘못하면 마을 전체가 책 분열에 오염되어서 책으로 가득 차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라 만싸는 조금 웃었다. 하지만 학자의 책에 대한 관심이 지극해서 그러한 것이지, 보통 사람의 경우엔 그러하진 않다. 당연한 일이다.

———-

만싸와 큐는 학자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두막 앞의 의자에 두 여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탐스러운 긴 금발만이 보였다. 만싸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쪽이 다영인 것을 알아보았다. 다영은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가, 만싸와 큐가 오는 것을 보고 연주를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만싸도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만싸! 안녕!”

“안녕! 노래 연주하고 있었어?”

“응. 하루츠가 속이 안 좋대.”

“여어. 만싸 왔냐.”

정정. 등을 보이고 있던 긴 금발의 남성이 고개를 돌리며 구수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하루츠(@xnxnapf)였다. 그 탐스러운 금발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요정의 증거. 그러나 그는 요정은 아니다.

“하루츠, 안녕.”

“뭐여? 그 뒤숭숭한 반응은?”

“너 금발이 오해사기에 딱 좋다.”

하루츠는 괜히 머리를 흔들며 긴 금발을 과시했다. 만싸는 다음에는 이발 기술을 익혀서 저 머리를 깎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발도 언젠가 필요한 기술일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것보단 면도 기술을 익혀서 반짝거리는 대머리로 만들어 버리는 쪽이 나을 지도 모른다. 큐가 하루츠의 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나 형이라고 부르지 마라.”

“안 부른다. 걱정 마.”

괜한 걱정을 하느냐는 듯한 피식거림으로 하루츠가 대꾸했다. 그러나, 큐는 그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오빠라고 불러라.”

“푸하하!”

하루츠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큐는 그를 무시하고 다영을 바라보았다.

“오빠는 책 받으러왔다.”

“낄낄, 그래 오빠. 아빠는 서재에서 책 정리하고 계셔.”

다영이 대답하자 큐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바로 발을 옮겨 서재 쪽으로 향했다. 만싸는 피식 웃으며 다영에게 바이올린 현의 조율을 부탁하고는 큐를 따라 발을 옮겼다.

—–

“할매! 심부름 왔다!”

“오냐. 늦었구나.”

할매를 찾아온 애나는 할매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전혀 안 늦었거든!”

“그래, 그래.”

할매는 할머니 같진 않았다. 조금 더 많이 폭삭 늙으면 할아버지 같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3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아직은 아저씨 소리를 듣는 나이다. 대장장이로서의 실력은 이 마을은 물론이고, 주위 마을을 둘러봐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할매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 위에 뛰어 올라가 앉는 애나를 흘끗 본 뒤에, 옆에 세워 두었던 칼 하나를 들어 올렸다. 칼은 상당히 가벼운 레이피어였다. 다만, 손으로 잡는 부분이 얇은 것으로 보아 미완성이었다. 할매는 손잡이의 끝에 받아온 철실을 꿰어넣어 묶은 뒤, 안쪽으로 손으로 움켜쥐는 부분에 철실을 감아가기 시작했다. 손잡이 부분이 모두 채워지자, 할매는 끝을 윗쪽까지 올려 한 바퀴 감아 묶은 뒤, 다시 한 번 더 아랫쪽으로 감아 내려왔다. 그리고 할매가 그 위에 얇은 가죽을 한 번 덧대자, 레이피어의 손잡이가 보통 볼 수 있는 칼 손잡이와 같은 두께가 되었다.

“다 되었구나.”

“할매! 나 나중에 칼 한자루 싸게 해주면 안돼?”

할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상황을 알아차리고 싱긋이 웃었다.

“칼은 왠 칼이더냐?”

“난 검사가 될거야! 엄청 훌륭한 검사!”

할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레이피어는 사실 애나를 위해 히비스가 준비해 둔 것이다. 철실은 차후에 마법을 담아 애나가 쓸 수 있게 하려는 용도. 그러나 애나는 그런 것은 까맣게 모른 채, 자기가 돈을 모아 사려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모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해도 그렇게 크지 않을테니, 아마 “할인”을 꽤 받아낼 모양이다.

“연습 많이 해야겠구나. 나중에 만싸에게 상대해 달라고 하려무나.”

애나는 투덜거렸다.

“만싸는 맨날 트집 잡아서 재미 없어.”

“연습 안 하면 할인 없다. 만싸한테 확인할거야.”

“쳇.”

할매는 만싸에게 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줬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애나가 이 칼을 받을 때 쯤엔, 자기 칼이 애먼 사람 찌르지 않을 정도는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할매는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어차피 이 곳은 드센 마물이 나서는 곳이 아니고 싸울 사람도 충분하니까.

———-

만싸와 큐가 서재로 사라지고, 다영이 기타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하려는 타이밍에, 다영은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영과 하루츠는 함께 고개를 돌려 숲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에트나(@etnamirr)가 있었다.

“에트나님!”

“에트나님!”

둘은 동시에 에트나를 불렀다. 에트나는 고개를 조금 끄덕여 둘에게 인사했다.

위대한 상위 요정 에트나. 여기가 진짜 세계수가 있는 마을이라고 믿을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존재. 그는 마녀의 강력한 물건을 세계수 한 가운데에 봉인했고, 그 반작용으로 요정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요정들 사이에서 여전히 특별한 것이고, 요정인 다영과, 일부 요정의 피를 갖고 있는 하루츠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트나의 눈에 하루츠가 보였다. 요정의 피를 받았지만 요정이지 아니한 하루츠. 하루츠는 에트나 자신이 봉인한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요정이 될 수 없다. 에트나는 그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처한 하루츠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도와줄 수 없었다. 에트나는 하루츠를 조금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그들을 스쳐 지나쳐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에트나가 나타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재의 문이 열리며 다영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무슨 일일까?”

하루츠는 궁금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다영의 아버지와 에트나는 둘은 뭔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서재 뒷 편으로 걸어갔다. 다영은 그에 개의치 않고 기타 연주를 시작하려 했다. 하루츠도 그냥 기타 연주를 마저 듣기로 했다.

바람 속에서 그 말이 들릴 때 까지는.

“…능력이 돌아오고… …. ….. ….. ….. …마녀의… …. …. …. ….”

“…물건은… …. ….. …되찾아… …”

하루츠의 몸이 굳었다. 하루츠는 멍하니 뭔가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 할 일이 생각났어!”

“…어, 그래. 바쁜 거지?”

“응! 나중에 봐!”

하루츠는 얼떨떨한 상태의 다영을 놔둔 채, 자리를 떠나서 마을을 향해 날듯이 달려갔다. 다영은 그냥 그러려니 한 채로, 가끔 연습하던 연습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큐와 만싸는 책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났다. 둘 다 꽤 무거워보였고, 만싸의 경우엔 책 위에 바이올린 가방도 함께 얹혀 있어서 상당히 아슬아슬해보였지만, 만싸는 상관없는 듯 했다. 만싸는 책을 오두막 앞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이올린과 구해 왔던 현을 다영에게 건넸다.

“지금 조율 해줘.”

“응. 알았어.”

다영은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만싸가 건네준 현을 바이올린에 걸고 나사를 돌리며 조으기 시작했다. 만싸는 하루츠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좀 둘러보다가 물었다.

“음? 하루츠는 어디 갔어?”

“몰라. 아까 할 일이 생각났다고 막 달려가던데.”

“그래?”

큐는 책을 들고, 다영이 조율하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조율하는 동안 형이랑 책을 들고 가면 되겠군.”

“땡! 책은 너 혼자 옮겨라! 나는 바이올린만 챙기면 끝이니!”

만싸는 의기양양해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큐는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괜찮을까?”

“뭐가. 네 팔이? 네 다리가?”

그러는 동안 다영은 네 개의 현을 다 걸었고, 고개를 들어 만싸를 바라보았다.

“활은?”

“어?”

당연히 활은 바이올린 가방 안에 있어야 한다. 바이올린을 맨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면 모르겠지만, 바이올린은 다른 현악기와 마찬가지로 활을 필요로 한다. 뒤늦게 바이올린 가방 안을 확인해 본 만싸는 바이올린 가방 안에 활이 없었음을 뒤늦게 확인했다. 활이 놓여 있을 자리는 있었지만, 활만 없었다. 큐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 이제 기억 나는군. 네가 바이올린에 관심이 있어 하길래, 형이 바이올린 활만 먼저 가져갔던 것 같다. 마침 잘 되었네, 책도 갖다 주고, 활도 받고.”

“..아우!”

“그래. 니가 아우지. 내가 형이고. 자 이제 책을 옮기자.”

“젠장!”

결국 만싸는 책을 다 옮겨주고 나서야 활을 받아 조율을 마칠 수 있었다.

———-

하루츠는 달렸다. 목표는 세계수 나무였다. 학자와 에트나가 대화하였을 때에 들렸던 말들이 단서였다.

마녀.

능력이 돌아온다는 얘기.

물건.

되찾는다.

다른 사람은 무슨 얘기인지도 모를 것이고, 혹시나 알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눈치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실상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에트나의 능력은 마녀의 물건을 세계수 중심에 봉인하는 것으로 거의 사라졌다. 거꾸로, 그 물건의 봉인이 풀린다면 에트나의 능력이 돌아올 것이다. 에트나의 능력이 돌아왔다면 물건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아마 마녀가 돌아온다면, 물건을 되찾거나, 최소한 되찾으려고 할 것이다. 즉, 마녀는 돌아오기 위해 물건을 되찾으려고 했고, 그래서 물건에 문제가 생겼으며 그로 인해 에트나의 능력이 돌아온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마녀가 있을 수 있는 곳은 그 물건이 있는 세계수일 수 밖에 없다.

마녀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하루츠의 복수를 완성할 수 있는 때였다.

하루츠는 세계수 앞에 도착했다. 세계수의 약간 앞쪽에는 항상 빛나는 신비한 구조물이 있고, 그 아랫쪽으로 작은 문이 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웨인(@WainUnions)이라는 수상쩍은 녀석이 살고 있다. 거의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세계수에 가장 가까운 구조물 지하에 뭘 하는지도 모르는 녀석이 들어가 있는데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것을 보면 정말로 무심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만큼 마녀의 “그 물건”과 “진짜 세계수”에 대한 사실이 잘 숨겨져 있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하루츠는 그가 소문이 안 좋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웨인은 예전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이 마을에 와서 세계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초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학자님도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를 변호해주는 것은 단 한 명, 그와 대화를 가끔 나눈다고 하는 만싸 뿐. 그리고 만싸는 지금 여기 없다. 하루츠는 이를 악물고 각오를 다졌다. 지금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할 때였다.

하루츠는 문을 벌컥 당겨 열었다. 안쪽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계단이 보였다. 불과 여덟, 아홉 계단 아래 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루츠는 이를 악물고 벽을 짚고 한 계단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그리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곳. 보통이라도 들어가지 않지만, 이상한 녀석이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버린 곳.

“..응?”

어두워지기 시작한 곳 부터 한 걸음 한 걸음씩 더 나아가던 하루츠는 주위가 갑자기 환해져서 놀라 멈춰섰다. 계단의 윗편에서 뭔가가 빛나고 있었다. 하루츠는 등불이라도 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계수 구조물을 빛나게 하는 장치와 비슷한 것으로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는 동안, 계단 아랫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

“칫!”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계단 맨 아랫쪽에 웨인이 있었다. 하루츠는 눈을 찌푸렸다. 몰래 들어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려했건만 깨끗하게 들킨 것이다. 하루츠는 정공법으로 나서기로 했다.

“여긴 성스러운 곳이야. 네가 멋대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지.”

“네 안전을 위해 나가라고 조언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이 안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봐야겠어.”

하루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나무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웨인은 그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싸우려는 거냐?”

“필요하다면.”

“그럼 나도 필요하니까 뭔가를 꺼내 들어야겠군.”

웨인도 허리춤에서 검은 색의 짧은 막대를 꺼내 들었다. 길이가 한 뼘 정도 되는 막대였다. 하루츠는 저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은 계단의 윗쪽에 있는 것도, 무기의 길이가 긴 것도 자신이라 유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웨인은 짧은 막대의 양쪽 끝을 잡고 좌우로 죽 잡아당겼다. 그러자, 막대가 길게 길어져, 양 팔로 벌린 것 마냥 길어졌다. 하루츠가 헉 하고 놀란 사이에, 웨인은 장대의 뒷쪽 끄트머리를 잡고 이쪽을 겨냥했다. 하루츠는 빠르게 접근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긴 장대 때문에 길이로서는 곤란해졌지만, 하루츠는 장대를 한쪽 벽에 밀어붙여 버리고 나면 바로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웨인이 갖고 있던 장대는 그가 예상하는 것 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였다.

웨인은 좁은 계단 폭에서 장대를 옆으로 휘둘렀다. 당연하지만 장대는 벽에 부딪혔고, 장대는 벽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거울에 빛이 반사되는 것처럼 꺾여서” 하루츠의 옆구리를 노리며 튀어나왔다. 하루츠는 깜짝 놀라 몽둥이로 그것을 쳐냈지만, 덕분에 튕겨나간 장대가, “벽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반대로 곧고 길게 바뀌며 하루츠에게 튀어나왔다. 자신이 쳐낸 힘에 웨인이 휘두른 힘이 더해지자, 몽둥이로 그것을 막아낸 하루츠는 손이 욱신거릴 정도의 충격을 받고 반대쪽 벽에 부딪혔다. 그 때였다.

“그만해두시게.”

뒷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츠는 웨인이 장대를 거두어 “줄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뒷쪽의 목소리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에트나가 계단 윗쪽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에트나님!”

“궁금한 게 많아서 그런 것일테지만, 하루츠, 자네는 여기 있어선 안 되네.”

하루츠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에트나님! 저 이상한 녀석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설명해주자면, 내가 그를 여기에 있게 했네. 그러니까 올라가보게.”

하루츠는 아랫쪽의 웨인을 흘깃 째려보고는, 결국 힘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하루츠가 올라가서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던 에트나는 문이 닫기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잘 지냈는가.”

“에트나. ‘그것’이 점점 더 날뛰고 있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웨인은 에트나보다 앞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에트나는 봉인이 풀릴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상대는 마녀였고, 자신이 “그 물건”을 빼앗아 봉인했을 그 때에 비해서 지금은 더 위험한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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