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JINKIM 기록 에세이 #1] 빌려쓰는 삶.

in #manamine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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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JINKIM 기록 에세이 #1] 빌려쓰는 삶.

글을 쓰자. 글을 쓰자고 매해 결심한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선언하듯 말한다. "나, 글을 쓰기로 했어, 인간은 어떤 것이든 기록해야 해. 글을 쓸 거야 ."

매번 잘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수차례 결심하면서 팬으로 연필로 노트의 다섯 장 내지 열 장 정도의 글을 쓴다. 항상 매년, 매달, 매주의 처음이라는 의미가 붙으면 뻐꾸기처럼 스스로 말한다. '글을 써야 해. 글을 쓰기로 했어.' 그리고 다시 시작으로 돌아간다.

매번 다짐하고 포기하는 것은 습관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게으름은 완전한 게으름이 아니라, 게으름마저 끝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이 게으름을 부릴 때 종종 떠오는 것들을 조악하게나마 어딘가에 남긴다. 그렇게 느슨하게 공개된 공간에서 기록을 시작했다.

기록한다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부유하는 것들을 하나에 쑤셔 넣고 돌아서면, 많은 것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내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자니 그들이 상처받을 것 같고 그들이 나오지 않는 글들을 쓰자니 어떤 이야기도 쓸 수 없었다.

그 결과물의 축적은 모든 변화가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상처받고 위로받는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한 감정이다.

'상처받은 기억밖에 쓸 수 있는 게 없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글쎄.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있지만, 간직하고 싶은 감정들과 고민은 모두 빼앗긴 것들에 대해 기록들이다 하겠다 그것뿐 떠오르지 않는다. 기쁘고 행복하면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남지 않는다. 행복은 풍족한 게으름의 다른 말임이 분명하다. 우울하고 불행하면 그 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머리를 굴릴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우울함에 대해 고민한다던가, 고통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파고드는 짓들을 한다. 그리곤 문득 머리를 스치듯 " 나, 무엇 때문에 괴로운 거지?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하고 있지?" 적고 있다.

우울의 우울
고민의 고민
생각의 생각

이 굴레를 연거푸 되풀이하다 보면 시작이 어디였는지 질문을 잃어버린다. 10평 남짓한 방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분명 돌아갈 길을 아는데 출구가 분명히 보이는데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방법을 알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결론은 항상 같다. 생산성 없는 불만, 결승선 없는 마라톤과 같은 권태로움은 주체성의 부재에서 온다. 그러나 주체성이란 애초에 가질 수 없는 허상이지 않을까. 나는 육체를 빌려 태어나, 생을 빨아먹고 자랐다.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완성한 것이 없다. 희망하는 것들 또한 비자발적으로 주입된 관념에 의하므로 자신의 판단 아래에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 것이라고 착각했지만, 삶과 시간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나에게는 내가 없으니 주체성은 성립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는 믿을 수 없다는 것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삶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무엇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가?

남의것을 빌려 내것인것처럼 입고 쓰고 생각하고있다는 죄책감이 늘 삶을 한 층은 무겁게한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자의식을 배제하고 필사적으로 정체성을 주변 존재들에게 위탁한다. 자존할 수 없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타인의 말에 묘사되는 나를 실제라고 믿으며 실제하지 않는것들로 삶을 이끌어가고있다. 주변인 덕에 내 존재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재 생산된다. 나는 끊임 없이 모습을 바꾼다.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그들의 나’ 다. 주체성, 스스로 만드는 세상, 스스로 존재함을 절대자만 가질 수 있는 특권으로 치부한다면 좀 더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사를 붙여가며 삶들을 기록한다. 혹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거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빌린 삶을 매일 되내이자면, 이런 환상들을 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12.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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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이려 노력하지만 애초에 주체성이 허상이라는 띵문에 감탄하고 갑니다!

19일전 답뎃 달기 띵!

뻔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도, 글을 통해 나만의 것으로 빛나게 되죠. 수진님의 글쓰기가 내 것 하나 갖는 일이 되길 응원합니다.
반갑습니다. 팔로우할게요. ^^

감사합니다 :) 뭐든 쓰며 사는건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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