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_부유함을 갈망하는 청춘들의 빈곤, 사물들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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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ra Letinsky

편지

점심에 L에게 전화가 왔어. 다짜고짜 시간이 있느냐. 잡담하고 싶으니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어. 그러겠노라 말하니 할 잡담이 없어졌는지 어색한 순간이 찾아왔지. 나는 L에게 최근 구입한 독일 B회사의 차는 어떤지를, 일은 잘 이어지고 있는지를, 삶은 어떻게 굴러가지를, 아파트 값은 여전히 오르고 있는지를 물었어. L과 한참을 돈과 인생, 앞으로 뭘 사고 버려야 할지를 이야기했던 것 같아. 4년차 신혼부부 생활에 접어든 L의 말 중 기억에 남는 건 자신에게는 경제활동에 대한 의무는 있지만 권리는 없다는 볼멘소리들인데 이게 참 양가적으로 들리더라. 적당히 좋은 차와 은행에 빚진 아파트를 2채나 가진 L은 어느덧 지난한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생존과 사치 사이에서 소비를 고민하는 주류의 삶을 살고 있었지. 어른이 다 됐달까. L이 부러웠어. B회사의 차, 서울의 아파트가 부러웠지. 하지만 제일 부러웠던 건 안정적인 현재가 연결된 미래였던 것 같아.

사물들, 조르주 페렉, 펭귄클래식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간해서 조금 더 잘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페렉의 사물들에서 제롬과 실비는 왜 그렇게도 이런 삶을 거부하고 도피하려 했던 것일까. 현대사회의 자본과 소비의 틀안에서 사물을 욕망하는 삶을 버린다고 해서 그것이 더 가치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숨길 수 없는 욕망 앞에서 소모되는 제롬과 실비의 삶이 나와 다를 것이 없더라. 그렇게 사는 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어. 어려웠지. 20대의 나라면 제롬과 실비처럼 호기롭게 말하고 부서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을텐데. 이젠 너무 무뎌진 것 같아.

‘매끄러운 냅킨과 침대차 문장이 찍힌 묵직한 식기류, 받침 접시는 댄 두꺼운 접시는 사치스러운 정찬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들이 맛볼 식사는 밋밋할 것이다’

제롬과 실비가 그토록 경멸하고 그들이 원하던 정반대의 삶은 정말 특별했을까. 혹은 진실했을까. 덜 속물적인가. 난 그 특별함이 어떤 그림인지 떠올려지지 않아. 그 삶에서 맛 볼 식사 역시 언젠가는 밋밋해 질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겠지. 영원히 불안하지 않은 미래는 없고 청춘은 찰나의 시간이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인가. 결국 우리는 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을 견디고 살아가는 것 뿐일지도 모르겠어.

밑줄

하나둘씩 차례로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항복해 갔다.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삶에서 안정을 찾아 떠났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이렇게 못 살겠어’ 라고 말했다. ‘이렇게’라는 말은 모호한 동시에 계획성 없는 삶, 너무 짧은 밤, 얼간이, 낡아빠진 재킷, 지겨운 일, 지하철과 같은 말들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삶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사방에서 삶을 누리는 것과 소유하는 것을 혼동했다. 그들은 시간의 여유를 갖고 싶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지만, 그들에게 무엇 하나 가져다주지 않는 세월은 마냥 흐르기만 했다. 결국, 다른 이들이 삶의 단 하나의 성취로 부를 꼽게 되었을 때, 그들은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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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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