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
마가복음 9장을 읽고 있다. 섬뜩한 말씀이 나온다. 42절에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나쁜 영향력에 대한 경계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사뭇 다른 주제로 갑자기 옮겨가는 듯 하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3절)" 이것은 개인의 경건에 관한 말씀인가? 같은 형식으로 45절과 47절에 반복해서 나온 후 지옥의 무서움에 대해서 48절에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보건데 42절은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서 41절과의 내용상의 관계가 없다. 그리고 42절부터 50절까지는 하나의 단락으로 내용상 응집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42절은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부정적 영향력에 대한 경계를 다루다가 43절, 45절, 47절은 연속적으로 개인적인 경건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된다. 게다가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니 평소의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강조와 전혀 들어맞지 않는 말씀이다. 이걸 가지고 지옥지옥 외치며 회개하라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또한 49절에서 50절로 넘어갈 때 독자들은 다소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49절은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라는 지옥에 대한 묘사인데 50절에서는 49절에 언급된 "소금"에 대해서 "소금을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라고 바로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옥과는 전혀 궤를 달리 하는 쌩뚱맞은 설명과 권고로 단락을 맺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43절, 45절, 47절이 말하고 있는 "손," "발," "눈"은 물론 신체를 의미할 수 도 있지만 공동체의 일원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42절은 43절, 45절, 47절을 설명하고 있는, 단락에 대한 개괄/해설적인 측면을 띈다고 볼 수 있다. 4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단호한 조처를 취하라고 이 후의 세 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49절 50절에서 나오는 "소금"이라는 단어가 그 힌트를 주고 있다. 49절~50절은 하나의 인사이드 조크라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서가 읽혀지고 있는 공동체 사람들만이 듣고 웃을 수 있는 말씀인 것이다. "소금이 되라"라고 가르치고 있었던 공동체 사람들이 이미 잃어버린 "그 맛."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그들은 이미 그 맛을 잃었으니 그들과 교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손을 자르듯, 발을 자르듯, 눈을 빼듯 하여 그들로부터 영향력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라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은 유효하니 너희들은 짠 맛을 잃지 말되 그들은 상관말고 너희들끼리 "서로 화목하라"라고 하는 결론인 것이다. 마가복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유대기독교 공동체와 이방기독교 공동체의 갈등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물론, 이 글은 학문적인 토대는 거의 없는 순수한 스페큘레이션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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