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Gap Eul Byeong Jeong

in #kr5 years ago (edited)

우리 전시기획사에서 수주한 정부 관련 프로젝트는 여러 단계 계약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40대 초반의 공무원 두 명이 정부쪽 실무 책임자, 즉 ‘갑’이었다. 아마 최종 결정은 그들의 상관이 하겠지만, 주임 급인 그들에게 대부분의 권한이 위임된 듯했다. 그리고 더 높은 정부 인사들이 위촉했을, 출판인과 문학인들로 구성된 ‘준비위원회’가 있었고 ‘위원장’이 있었다. 위원장은 ‘갑’보다 살짝 위인 ‘슈퍼 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공무원이 아니므로 위치가 불안정했다. 정치와 명분의 역학에 따라 권력 크기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전시기획사의 사장은 바로 그 위원장과 끈끈한 친분과 이익관계로 엮여 있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위원장의 지시(?)를 받아, 프로젝트에 대한 공모가 나가기 전부터 모든 실무를 우리 전시기획사에 의존해서 처리해 나가며 프로젝트의 수주를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준비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취합해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프로젝트 콘셉트와 절차를 글로 풀어내어 공고문을 작성하고, 기본 로고를 만들고 디자인하는 등의 일을 우리 회사에서 무료로 해주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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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회사는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의 수주를 맡을 정도의 회사 규모가 안 됐다. 100억 이상의 예산이 드는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자본금을 가지고 있는 회사, 그런 예산의 프로젝트를 해본 경험이 있는 회사만 공모에 지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장은 우리에게 가끔 일을 맡기던 대형 광고기획사(이벤트기획사)의 팀장을 시켜, 그가 그 프로젝트를 맡도록 물밑 협의를 했다. 이미 공모 전에 위원장과 함께 회의를 한 다음, 거기에 맞춰 광고기획사가 내야할 기획서를 우리 회사에서 써주고, 프리젠테이션도 지도했다(물론 무료로).

그러고 나서 그 광고회사가 프로젝트를 따내자, 우리 회사에 재하청을 줄 세부 전시 파트와 이벤트들을 협상했다. 사실상 뭐, 거의 모든 파트였으나… 역시나 큰 돈이 드는 설치물 같은 부분은 또 다른 전시기획사가 불쑥 끼어들어 우리 사장의 속을 썩이기도 했고, 우리 역시 재재하청을 줄 소프트웨어 개발사 등이 필요했다. 즉, 형식상 광고회사는 ‘을’, 우리 전시기획사는 ‘병’이었고, 나는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을 ‘정’ 개발사를 수소문하게 됐다.

그렇게 찾아낸 ‘정’ 회사와의 이면 계약도 나에게 맡겨졌다. 메인 전시의 스마트 기기 100대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갑과 을로부터 지시받은 예산은 1억원이었지만, 우리는 1억원짜리 계약서와 5천만원짜리 계약서 두 개를 썼다. 1억원짜리 계약서는 갑과 을에게 제출하고 5천만원짜리 계약서는 병과 정만 보관했다. 우리가 5천만원을 남겨먹은 것이다. 회계상으로 어떻게 합리화가 가능한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이면 계약서를 ‘정’ 회사의 담당 부장에게 요구했을 때, 자신보다 어린 여자인 나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는 흔쾌히 그러자고 한 후 기념으로 단란주점에서 한턱 쏘겠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부장님,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돈을 드리는 입장인데, 부장님한테만 좋은 회식을 하자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 사주세요.”

아마도 그게 나의 첫 갑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우리의 서류상 위치는 ‘병’이었지만, ‘정’을 상대로, 권력이 내 손에 쥐어졌으니까. 그리고 이후 우리 회사의 임시직들을 상대로도 권력이 쥐어졌을 때,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아마도 내 생애에서 유일한 때가 아니었나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의 갑질이 계속 잘 먹혀든 것은 아니었다. 내가 뽑은 한 후배는, 내가 퇴근 시간까지 다 끝마칠 수 없는 업무 지시를 하자,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야근 수당 줄 것 아니면 그 전에 마칠 수 있는 업무량을 달라고. 나는 할 말을 잃었고, 후배를 퇴근시켰다. 그 당시는 전혀 그런 요구가 가능한 분위기도 아니었는데, 열 명이 넘어가는 팀 가운데는 그런 사람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진짜 원하던 회사로 옮겼고, 그럴 정도의 능력이나 용의가 없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무료 야근에 시달렸다.

물론 나의 갑질이 먹힌 사람도 있었다. 새로 뽑은, 열 명이 넘는 계약직 직원들 가운데는 내가 뽑지 않은 낙하산 인사도 있었다. 이전 글(washing dishes)에서 갑질을 했던 고참 직원들 중 한 명이 자기 지도 교수의 부탁으로 동문을 채용해 나의 팀에 밀어넣은 것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얼결에 사람을 받고 보니, 경력도 거의 없이 대학원만 나와서 업무 능력이 많이 떨어질 뿐 아니라 컴맹에 가까운 인력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점차 신경질을 부리다가, 나중에는 사무실에서 거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지만, 이상하게 그녀는 그런 나에게 늘 살갑게 굴었고, 둘 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꽤 연락이 이어졌다. 업무 이외의 부분에서는 그녀와 나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취향도 비슷했고 둘 다 걷기를 좋아해서 같이 퇴근할 때는 회사가 있는 덕수궁에서 집이 있는 홍대까지 함께 걸어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는 갑질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몇년전 드라마 <밀회>에서 재벌가 딸인 친구이자 상사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김희애가 “악! 얘! 너 손 너무 맵다고 내가 그랬지?” 하고 소리치며 천연덕스럽게 뺨을 문지르던 모습이 왠지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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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독일 출장 이야기는 다른 블로그에서 https://uchatn.tistory.com/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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