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삶은 흐른다, [한티재 하늘]

in #kr8 years ago


우리에게 「강아지 똥」,「몽실 언니」의 작가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이다. 선생을 떠올리면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이 떠오르는데 평생을 그렇게 욕심없이 살다 가신 분이어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어둠 보다는 긍정과 희망,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잘 그려져 있다. 그것은 거창한 휴머니즘이라기보다는 ‘삶을 견디고 버티는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선생의 일생을 비추어 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겠다. 따라서 선생의 작품 속 인물들의 불행은 인물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런 이유로 현실을 대하는 인물의 방향은 대개 의지와 투쟁이 아닌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견뎌 나가냐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 내가 이야기 할 책 「한티재 하늘」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구한말의 격동기부터 만주사변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의 무대가 굉장히 광범위하겠지만 이 소설은 경북 안동의 어느 화전민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흥선 대원군이나 고종의 이야기 같은 우리가 잘 아는 중앙 정치의 이야기는 없다. 다만 선생의 여느 작품처럼 혼란한 격동기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무대 역시 일종의 고립된 공간이다.
‘한티재’라는 지명은 백두대간의 산자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명이지만 그 이름의 유래처럼 사방이 깎아지른 산으로 둘러싸인,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처럼 그야말로 바라볼 것이라고는 그 높은 산봉우리 끝으로 보이는 하늘 밖에 없는 곳이다. 당시 화전민의 삶이란 것도 그렇다. 저마다의 이유로(대개는 가난) 살기 좋은 평지의 마을에서는 살 수 없어서 척박한 비탈을 일구고 나물을 뜯어서 삶을 이어가는, 비탈밭의 농사나 잘 되면 읍네 시장에서 생선 마리나 바꿔서 먹으면 족한, 그래서 사실 더 나은 삶의 방향성이나 기대 같은 것을 품고 살기는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개를 한껏 치어들어야 겨우 몇 평쯤 작게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 수 없는 것이고, 그 하늘은 이 마을의 사는 순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기약없는 구원이자 답답한 삶을 겨우 달래주는 작은 공간이다.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이곳의, 이들의 삶 역시 늘 애처롭고 간당간당할 뿐이다. 그리고 역사는 이 외진 곳의 이들에게까지 예외없이 닥쳐와서는 선택을 강요한다.

원래 10권쯤으로 계획했던 이 책은 선생의 말년의 건강 문제로 안타깝게도 2권으로 미완되었다. 선생은 살아 생전에 이 책의 글들을 두고 '뼈를 깎아서 피로 쓴 소설'이라고 말했다. 또 선생은 스스로 『20년 전부터 썼다면 이미 완성됐겠지만 쓸데없는 치기나 젊은 혈기 때문에 지금처럼 곰삭은 글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나로서는 책의 미완이 참 안타까운 일이고 이 또한 선생께서 생전에 감내하셔야했던 그 무슨 비극적 운명의 하나같아서 참 서글픈 생각까지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선생이 이 책을 쓰신 목적을 말씀하신 육성을 옮기면서 그런 마음을 달래본다.

"이 소설을 읽고 우리들의 선조는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대를 잘도 헤쳐나 왔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어려워졌다고 목숨을 버리거나 인륜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권정생

그들의 삶을, 책의 줄거리를 여기에 옮겨 적지는 않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얽힌 작가의 말을 옮기며 책의 소개를 마무리한다.

▷작가의 말

20년 전 어느날, 버스를 타고 나는 청송 칠배골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안동 읍내 양반댁 종년이었던 달옥이 아지매와 한밤중에 도망쳐 가서 살았던 이석이 아저씨네는 이젠 거기 살지 않았습니다.
귀돌이 아지매가 열한 살 나이로 민며느리로 가서 살다가, 동생 분옥이가 보고 싶어 몰래 홍시감 네 개를 들고 할딱거리며 넘어 오던 사구지미 고갯길은 고속도로로 깎여 나가버렸습니다. 이순이 아지매가 남편이 일본 노무자로 끌려간 뒤 밀주를 담가 팔아 근근이 살다 들켜, 벌금 50원 때문에 외팔이 등짐장수와 하룻밤 지냈던 솔티 꼭지네 주막도 어디쯤이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길수 아저씨가 반란군(의병)으로 나갔다가 죽어 묻힌 일월산에도, 수동댁 할머니가 벙어리 며느리 채숙이 아지매와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손자 종대와 함께 가서 살았던 울진 바닷가에도, 분옥이 아지매가 문둥병 때문에 소박데기가 되어 각설이 동준이 아저씨와 가서 살았던 영양 다래골 골짜기에도, 분들네 할머니의 두릅골에도, 지금은 모두 떠나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등을 돌린 채 혼잣말처럼 조용조용, 산에 가면 산나물을 뜯으면서, 인동꽃을 따면서, 밭에 가면 글조밭을 매면서, 집에서는 물레실을 자으면서, 바느질을 하면서, 서럽고 고닲았던 우리네 백성들의 이야기들 아름다운 사투리로 들려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 옮겨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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