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기억에 저 마다의 습기가 있고 우리가 그 습도를 감지할 수 있다면, 어떤 것에
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어떤 것은 만져도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
것이 있는가하면 어떤 것은 말라부스러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도 있을 것이
다. 이러한 기억의 습기는 신기하게도 시간과 전혀 무관하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몇 되지
않는다. 기억에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떠한 나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무
의미한 시간은 빨리 간다고 한다.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時空과 대상에는 기
억이 머무를 어떤 여지도 없다. 기억은 곧 有意味인데, 유의미란 당파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기억을 사실 그 자체로 여긴다. 하물며 추억까지도 사실과 비슷한 것
으로 간주한다. 엄밀히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다. 추억은 기억에 비해 자신
의 입장이 더 많이 반영될 여지가 다분한 사실이다.

같은 대상을 가운데 놓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해도 결과물은 다 다
르다. 같은 시나리오를 주고 영화를 만들라고해도 마찬가지다. 엇비슷한 경
우가 많겠으나 게중에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결과물도 있을 수 있다. 확실
한 것은 같은 경험을 공유하였다해도 엄밀히 똑같은 결과물은 나올 수가 없다
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보는 입장과 방향에 따라 나의 [포착]은 다채로운 파
장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기(추)억도 이와 같다.

영화에서 인공지능은 대화를 통해 기억을 축적/학습해나가는 존재인데 물리
적 상실을 대체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이라고 마다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사람]과의 대화를 원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을 이루는 핵심은 나와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다. 기억의 축적/학습이란 같은 시공의 좌표를 구축하는 것
을 말하며 그 좌표는 곧 정체성이 된다. 자신을 미심쩍어하는 사람들에게
인공지능들은 늘 말한다. 더 많은 기억을 갖게 되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
고... 왠지 우리가 하는 말들과 닮아있다. 다음번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
고... 알파고처럼 확실히 인공지능은 사례나 경험이 누적될수록 더 다양한
경우에 더욱 그럴싸한 결과를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람이 늘 그런
존재이던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의식적으로 변조된 경우 이외에도 우리의 기억이 불완전
하거나 정확하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또한 그러한 기억의 정확도에 비
례하여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시공의 좌표를 각자 개
인화시킨 결과물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과 사실을 혼동하는 이유는
개인화 과정에서 이 두가지가 서로 분리하기 힘들 정도로 뒤엉켜버리기 때문
이다. 그러나 기억은 언제나 사실 + 견해(입장)를 말한다. 어떠한 기억을 반
복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떤 사실 보다는 그에 즈음한 자신의 견
해와 태도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사실의 개인화 과정
은 곧 기억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달라붙는 습기는
시간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했더래요. 갑돌이와 갑순이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
은 이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의 수에는 제약이 있다. 몇 대가 내려
가면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이야기가 더 많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이야기를 글이나 다른 것으로 만들 수도 있겠으나 이것도 영원한 것
은 아니다. 아름다움이나 기억을 지속시키려는 인류의 노력이 예술과 역사의
기원이다. 불완전한 기억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본다.

살아서 믿지 못하던 상대를 인공지능으로 만든 후에는 믿을 수 있을까. 그렇
다면 그는 안도할 수 있을 것이며 과연 그 안도는 정당할까? 불완전하고 때로
는 엉뚱하기까지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삶이 온전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갑돌(순)이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 이
얼마나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