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정도전과 정몽주 (누구나 기득권이 되면)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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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도전과 정몽주 (누구나 기득권이 되면)

정도전과 정몽주의 공통점

· 고려말 유학자.정치가

· 부정부패와 기득권과의 투쟁

· 엄친아

이성계와 최영의 공통점

· 고려말 무인

· 청렴결백

· 맹장.덕장

금수저: 정몽주와 최영

흙수저: 정도전과 이성계

정도전과 이성계는 흙수저 출신들이기에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의 족쇄를 풀고 싶었습니다. 대신 정몽주와 최영은 아주 좋은 고려 명문가 출신들입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친구며 동지며 뜻을 같이 했습니다. 최영과 이성계는 형제처럼 전쟁터를 누볐습니다. 서로를 의지했고 힘없던 고려에서 원과 명을 상대하며 힘들었던 시절을 같이 보냈습니다.

썩어버린 고려를 개혁하고 싶었던 정몽주와 최영 대신 썩어버린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싶었던 정도전과 이성계.

아무리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기득권이 되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고칠 수는 있지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옛날 고물을 고쳐서 쓰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고 쉬울까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만 자신이 기득권이 되면 할 수가 없습니다. 살려고 고치는 것인데 버리게 되면 자신이 죽게 됩니다. 살자고 하는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

조선을 세우는데 일조를 한 정도전은 왕권에 도전을 하게 됩니다. 왕권정치가 아니고 신권정치를 하고 싶어합니다. 나쁜 왕이 나오는 것을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세우는데 공을 세운 정도전은 충신에서 역적으로 변하고 조선을 세우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정몽주는 역적에서 충신으로 변하게 됩니다.

조선을 세우기 전에는 정도전이 필요했지만 조선을 세우고 왕권을 확립하려면 너무 강한 공신은 필요 없어집니다. 토사구팽을 당해야 합니다. 대신 나라를 지키려는 충신이 필요합니다. 정몽주가 필요하게 됩니다.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도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기는 했지만 식구들은 살려두었습니다. 그리고 정도전의 식구들은 기득권이 됩니다.

정몽주의 추종자들은 사림이 되고 정도전의 추종자들은 훈구파가 되서 조선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정도전의 훈구파는 이율곡으로 대표되고 정몽주의 사림 대표는 이퇴계입니다. 정도전의 훈구파가 힘을 잃고 정몽주의 사림이 득세를 하면서 조선은 중심을 잃고 침몰을 하게 됩니다.

기회주의자들이거나 기득권이거나

박정희대통령을 거론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사를 논할 수 없습니다. 박대통령은 보수였을까요 아니면 진보였을까요?

친일파도 했고 빨갱이도 했고 보수도 했고 흙수저에서 금수저도 되고 도대체 박대통령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냥 수 많은 사람들처럼 기회주의자입니다. 이기적이고...개인적으로 제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애국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애국심이라? 박대통령이 없는 중 하나가 애국심일겁니다.

이민 온 사람들 입에서 나오기는 힘든 단어입니다. 군대를 안간 사람이 뱄기는 힘든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5분만 생각하면 안해도 되는 단어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지켜준다면 그렇지만 나를 버리는 국가을 위한 애국심은 멍청함이겠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국가도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자적입니다. 필요 없는 국민은 슬쩍 버립니다.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잘살고 잘먹고 자식들이 잘됐으면 하는 바램이 기본입니다. 촌스럽게 애국심으로 포장을 할 수는 있지만. 애국보수는 꼴통보수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기득권이 되면 보수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욕하지 맙시다. 누구라도 기득권이 되면 변하게 됩니다. 기득권도 아닌데 보수 그런데 태생이 보수면 아주 힘든 상황이 됩니다.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은 진보일까요 보수일까요? 흙수저 일까요 금수저일까요?

더불어 민주당은 진보였습니다 그리고 흙수저였습니다. 과거에는 진보였고 흙수저였습니다. 지금은 진보도 아니고 흙수저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보수며 기득권이냐? 답은 어쩡쩡하다는 겁니다.

정체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당황스럽습니다.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믿을만한 다른 놈들을 있는 것도 아니고.

진보냐 보수냐 촌스러운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물론 생각이나 행동이 진보적이나 보수적일 수 있지만.

스스로를 평가하자면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자이며 동시에 진보적입니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겁니다.

질문으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태생이 보수인데 흙수저면 참 딜레마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금수저인데 진보적인 것도 딜레마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정도전과 정몽주는**
위키백과에서 펌

정도전 (진보 흙수저)

경상도 순안현(지금의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주 우씨이다.

양광도 단양(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이방원과의 갈등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의 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포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임금은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고 멍청한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도전은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재상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후일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처형하고더불어 세자 방석도 살해하였다.

조준은 그가 죽자 정몽주가 정도전의 음해로 죽었다며 복권을 상소하였다. 조준의 상소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태종 때 가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정몽주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 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경상도 우항리와 고려 경상도 영천현을 거쳐 고려 개경에 거주하였던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4년) 4월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상북도 우항리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라고하나 기록은 없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었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태종은 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사림파가 집권한 후에도 그의 문하생이라서 그에대한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성인화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 건국 초까지만 해도 그는 간신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녀 중 한 명은 정종의 다섯째서자와 결혼했고, 그의 제자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을 거쳐 사림파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 권우는 세종대왕과 정인지의 스승이 된다. 태종은 왕조가 확립된 후 왕실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규탄하면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유도할 목적으로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끌어올렸다.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에게서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 그는 성자로 인식되었다.

성역화

그의 사후 태종은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는 그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였다.

세종대왕은 왕자시절 정몽주의 문하생 권우에게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세종대왕 즉위 후, 편찬한《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정몽주가 수록되었다. 세종대왕은 부왕 태종 이방원에 이어 정몽주를 충절의상징으로 성역화시켰다.

성종이 훈구파(공신 세력)의 견제를 위해 그의 후신인 사림파를 발탁하면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려는 운동이 나타나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1555년(명종 10년)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임고서원이 창건되고,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배향을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배향을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1611년 참찬관 이자가 정몽주의 묘를 수리할 것을 건의했다. 중종은 예조 정랑 이순(李純)을 보내어 정몽주의 무덤에 치제를 했다.

퇴계 이황의 주도하에 영천 지역 퇴계 이황의 문인들인 김응생, 정윤량, 노수 등을 중심으로 부래산에 임고서원이 창건되었다. 퇴계 이황은 임고서원의 제문과 상향축문을 지어 정몽주의 학문과 충절을 극찬했다. 그 뒤 임고서원은 1584년 ‘영천구각본’, 1607년 ‘영천중간본’ 등 3종의 ‘포은집’을 간행하여 발표하였으며, 임고서원 입구엔 포은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지었다는 시조 ‘백로가’와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가 나란히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숙종 때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는데, 송시열이 비문을 찬하고 김수증이 썼으며 1699년에 건립되었다.

그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반대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폄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현창, 미화, 이용하였으며, 후일 사림파의 집권 이후에도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선조인 정몽주에 대한 현창이 필요하여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는 계속 이어져오게 되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간신으로 규정됐던 정몽주는 태종 대에 이르러 충신으로 변신하고, 이어 사림파들이 장악한 중종 때는 문묘에 종사해야 할 유학의 종장으로까지 추대된다.[26] 세종대왕 때는 임금이 그의 손제자였으므로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 때에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는 성역화되었다.[32] 이는 성리학을 조선 유학의 적통으로 삼으려는 사림파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는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 말에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섬겼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지만, 결국 사림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중종 12년에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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