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의 사람들

in #kr2 years ago (edited)


벽 너머의 사람들을 드디어 만났다. 조촐한 학원 연주회가 있는 날이었다. 주로 창작인들과 교류하는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자리였다. 피아노를 제외한다면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언젠가 연습하다가 벽 너머에서 <산중호걸> 동요를 누가 치고 있길래 그 순수한 멜로디를 한참 감상했던 적이 있었다. 내 옆에 앉은 50대 정보과 형사님이 그 주인공이었다. 빡센 포마드 스타일에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말끔하게 차려입은, 나와 동갑이었던 댄디한 남성은 <곰세마리>를 수련 중이라고 했다. 내일은 그랜드피아노 연습실에서 <곰세마리>를 칠 수 있게 되었다며 격앙된 표정을 비췄다. 나는 사람들에게 한 번 쳐보라고 부추겼다. 여기서 <곰세마리> 치면 완전 인기 짱일 거라고. 댄디보이는 호걸형사님을 가르키며 아니 호랑이가 나서지 않는데 감히 곰이 어떻게 나서겠습니까,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슈만 소나타>를 연주했던 50대 여성은 시종일관 자기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직장에 입사한지 얼마 안됐지만 부장님과의 회식 자리가 너무 노잼이다, 라고 토로했던 맞은편 20대 여성의 말에 공감이 갔다. 슈만 선생님은 본인 외모가 동안이라며 셀프칭찬이 이어졌고 우리는 리액션에 어려움을 겪었다. 호걸형사님 한마디 했다. "저 분 체포할까요?" 투쟁 현장에서 악명 높았던 정보과 형사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실수투성이었던 내 연주가 끝나자마자 큰 소리로 "천재 아니에요!?" 라고 호들갑 떨어주신 슈만 선생님을 다시 애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술에 다들 취했다. 등쌀에 떠밀려 비틀비틀거리며 피아노에 앉았던 쇼팽님은 미스터치를 연발하며 결국 <발라드 1번> 연주를 중간에 중단했다. 밤늦게 파티가 끝나자 나는 거기 있었던 헬륨풍선을 하나 가방에 묶었다. 집에 도착하니 풍선은 온데간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