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책리뷰 - 스타쉽 트루퍼스

in #kr6 years ago

혹시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여러모로 인상적인 영화였을 겁니다. 스타크래프트를 해보신 분들께서는 테저전이 연상되었을테고, Would you like to know more?라는 의도치 않게 뿜게 하는 문구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허접스러운 액션영화로 남았지만, 전 이 영화를 보면서 뭔가 씁쓸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영화로 남다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 엄청난 영화의 원작은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의 소설, Starship Troopers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는 1959년에 출판되었는데, 벌써부터 우주전투, 강화 슈트, 지성 군체 등의 개념들을 제시했으니까요.

전 어렸을 적, 미국에서 90년대 중반에 살 때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다른것보다 우주군대라는 소재니 개쩌는 전투 묘사를 기대하면서 책을 구했고, 실제로 한 5년 동안은 생각보다 몇 안 되는 전투 부분만 읽었습니다. 제대로 된 전투는 참고로 책에서 딱 세 번 정도 나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는데, 제가 어렸을 적에 이해가 안 되고 재미없다고 넘겼던 부분들이 점점 와닿았습니다. 어렸을 때보다 조금 더 시니컬해지고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어졌는지, 주인공인 쟈니 리코의 독백이나 쟈니와 뒤보아 선생 간의 역사와 윤리에 대한 논쟁이 오히려 흥미를 끌었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의 전개 내용은 딱히 복잡하진 않습니다. 꽤나 부자집 외동아들인 쟈니는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지원합니다. 지구를 지키겠다는 어떤 원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친구와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군대를 지원하니까 "나도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들어간, 어쩌면 김빠지는 이유죠. 전함 파일럿을 지망한 여자와 공돌이여서 공학부대 지원병으로 들어가게 된 친구와 달리, 쟈니는 복잡한 건 다 불합격처리되고 땅개, 즉 육군에는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훈련소에 투입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훈련소 --> 첫 번째 전투 (대패) --> 새로운 부대로 이전 --> ROTC --> 끝 없는 전쟁, 매우 평이합니다.

이 정도였다면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책이 아니었겠죠? 그럼 이제부터 이 책이 어떤 면에서 독보적인지 보겠습니다.

  • 시대를 앞서간 공상과학 전투 묘사

일반 병사를 대량살상병기로 만들어주는 강화 슈트(무장: 화염방사기, 빔소총, 어깨부착형 유탄발사기, 원자폭탄 로켓런처)로부터 시작해서, 병사를 투입하는 우주선의 드롭 시스템(묘사에 따르면 자동권총에서 총알이 한 칸씩 앞으로 가듯, 병사가 들어가있는 캡슐이 우주선에서 발사됩니다. 스타크래프트의 드롭십과 매우 유사하죠), 쥐고 있지 않으면 자동으로 회수되는 병기, 행성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초신성 폭탄. 이게 인류의 무기입니다. 무시무시하죠?

그리고 주적으로 등장하는 벌레들(진짜로 Bug라고 표현합니다)은 영화에 나온 것과는 달리 화기를 소유하고 있고, 간지쩌는 강화슈트를 삶은 달걀마냥 갈라버릴 수 있는 화력과 지하에서 모든 전사를 신경학적으로 지휘하는 두뇌 버그라는 전투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네, 저그와 많이 유사하죠? 아무래도 스타크래프트는 이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병기나 화기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지휘 체계의 묘사입니다. 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잘 훈련이 되어도 인간 지휘관은 인간 병사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지휘할 수만 있죠. 반면 버그는 말그대로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두뇌 버그가 수많은 버그 병사를 "조종"합니다. 쟈니는 이렇게 표현하죠: "공산주의를 진화를 통해 받아들인 종족은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이다."

효율성의 대치점에 서있는 인간성. 그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라고 볼 수 있겠죠.

  • 군대가 사회에서 갖는 위상, 그리고 그에 따라 수반되는 책임과 권한

쟈니의 수업 중에서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이거입니다. "권한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뭔가?"

정답은 책임입니다. 스타쉽 트루퍼스의 세계에서 군 복무는 선택이지만, 군 복무를 완료하지 않은 사람들은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조국(아니면 모행성)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킨다라는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자는 그 모행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좌지우지할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얼핏 생각하면 지금 저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와는 매우 다릅니다. 단순히 어딘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곳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 모행성을 지켜야만 그러한 결정권을 갖는 시스템이죠.

책임과 권한의 균형이 안 맞으면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입니다. 책임 없이 권한만을 부여하면 이는 재앙을 초래하며, 권한 없이 책임만을 부여하면 이 역시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나옵니다. (뒷문장에서 우리나라 군대가 연상되는군요)

이 책은 또한 군 복무가 사람을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즉,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시민으로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론이나 정책에 대한 지식이 아닌, 그 시스템을 위해 희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심도 있는 고민을 하는 자세라는 겁니다. (이 때문에 스타쉽 트루퍼스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솔직히 이에 대해 정답을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 기타 사회적인 이슈

자세히 들어가기엔 너무 길어지겠지만, 스타쉽 트루퍼스의 세계관에선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보입니다.

먼저, 육군 병사 중에는 여자가 없습니다(영화와는 다르죠). 우리나라 군대마냥 훈련소에서는 여자에 대해 환상하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고 말하는 걸 보니......단, 우주선을 조종하는 파일럿들은 대부분 여자로 나옵니다. 이유는 여자들이 생체학적으로 (동체시력, 공간감각, 고속 비행에 대한 신체 적응력 등) 우주선을 모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겁니다. 성차별적인 사회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철저히 효율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아동 체벌과 인간의 윤리에 대한 논의도 나옵니다. 과거에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졌을 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쟈니의 선생님은 당시 육아에 있어서 체벌은 아이에게 영구적인 심리적 상처를 주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고, 이로 인해 다음 세대는 절제력과 희생정신을 전혀 배우지 못해 결국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고 주장합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잔혹하고 특이한 처벌'을 금지한다는 명목 하에 체벌을 금지시켰지. 그런데 처벌이 잔혹하지 않고 특이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쩌란 건가?"
"인류는 진화를 통해 고통이라는 것이 뭔지를 깨달았지. 고통만큼 사람이 특정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는 없는데, 그걸 왜 사용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윤리적 본능이 없다. 윤리라는 것은 교육과 주변에 대한 관찰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는 것이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결국 인류는 성인이 되서도 윤리관이라는 것이 없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그대로 부정하는 백지설이죠. 시니컬하게도 전 마지막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윤리라는 것은 후천적으로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의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 마무리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어쩌면 지극히 B급 SF소설같은 제목이지만 안에는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질서 등에 대한 철학이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이 B급 액션 영화로만 남는 것이 싫기에 두서 없이 길게 써봤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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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적에 영화를 접했었는데. 엄청 재밌게 본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본질, 질서와 관련된 의미있는내용이 있는 줄을 몰랐었네요. 어릴때라서 그런지 단순히 괴물을 죽이는 영화로 인식하고 봤던거 같습니다.

영화는 오히려 소설을 비꼬는 마음으로 제작했다고 감독이 말한 바 있습니다. 소설이 (의도되었던 아니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모습이었다면, 영화는 그 군국주의를 비꼬는 투죠.

그리고 버그와의 싸움은 인상적이긴 합니다. 저도 어릴 때는 마찬가지로 괴물사냥 영화로 봤었죠 ㅎㅎ

안녕하세요.
이 서평은 1회 스팀잇 서평대회 최종후보로 선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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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만 알았었는데, 책 내용은 처음 알았습니다. 중간에 권한과 책임이 같이 간다는 부분에 특히 와닿았어요. 이론적으로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잘 안되는 안타까운...

실제로 그게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죠. 아무래도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많고, 책임에 시달린 채 권한이 없는 자들은 힘이 없는 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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