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36] 인디언의 몸부림 속 강인한 정신력

in #kr8 years ago (edited)

[Art36] 인디언의 몸부림 속 강인한 정신력

'인디언'의 정식 명칭은 'Native American (네이티브 아메리칸, 아메리카 토착민)'입니다.
인디언의 명칭은 콜롬버스의 항해(1942.10.12.)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디언의 역사>

이탈리아 출신인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는 지도를 연구한 결과 서쪽 항해를 통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항해는 포르투갈 왕(1484, 희망봉 아프리카 루트 계획)과 에스파냐(1486)에서도 거절 당합니다. 그리고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에도 거절 당합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상황은 조금 복잡하였는데 스페인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사벨 여왕 이야기의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라나다, 포르투갈의 4개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카스티야 궁궐에서는 엔히크 4세가 왕권 유지를 위해 이사벨 공주(3살)와 두 동생, 태후를 시골마을로 유배시킵니다.
엔히크의 횡포와 무능함으로 이사벨 공주의 동생 알폰소를 왕위에 추대하는 3년 간의 내란이 있었으나 동생 알폰소가 갑작스레 죽게됩니다.
이에 현명한 이사벨 공주(15살)는 내란의 명분과 힘이 약함을 깨닫고 엔리케를 지지하며 백성들의 내란을 멈추게 합니다.
그 후 엔히크는 강력한 포르투갈과 혈연을 맺고자 이사벨을 시집보내려 하지만 이사벨은 명을 받들지 않고 젊고 포부가 있는 페르난도에게 청혼을 해버립니다.
(그녀는 결혼 계약서를 미리 준비해두었다고 하는데 자신을 왕비가 아닌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인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합니다.)
이에 페르난도는 군대를 끌고와 결혼을 하였고 이 후 엔히크가 서거 후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사벨이 궁전을 도망나와 바야돌리드에서 상인으로 변장한 페르난도와 결혼식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후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합병하여 에스파냐를 통일(1479)하였고 힘을 합쳐 그라나다(이슬람)를 정복(1492)합니다.


당시 에스파냐 교회의 성직자들은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고 때문에 영왕을 설득하게 됩니다.
이사벨 부부는 해외진출의 관심으로 이를 승인하고 콜롬버스를 지지합니다.
특허장에 의하면 직조장의 아들인 그에게 발견한 토지의 부왕의 권한까지 임명하는 내용도 있었다 합니다.
'국왕의 대리 칭호까지 쓸 수 있도록 하고 특권(산물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산타페 협약)'

당시 여왕은 지원금과 선박 2척, 그리고 승무원이 될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제시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콜롬버스는 포르투갈과 인도는 가까우며, 적당한 바람만 있으면 며칠만에 도착한다'라고 생각한 오류(실제와는 약 4배 차이) 때문에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놀라운 발견이 시작됩니다.

1492.8.3. 출발한 배는
1492.10.12. 33일 만에 바하마제도의 와틀링섬을 발견하게 되고, 이어 쿠바와 아이티에 도달하고 콜롬버스는 여기를 본인의 원래 생각대로 인도라고 여겼습니다. 일기장에 의하면 죽을 때 까지도 인도라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을 인도인이라 불러 '인디언'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디언'이라는 말은 잘못된 믿음에서 생겨난 명칭이었습니다.


<콜럼버스와 유럽의 세력>

지구가 동글지 않다고 믿었던 당시, 그의 귀환은 놀라운 사실이었고 끝없는 궁금증과 식민지에 대한 엄청난 부를 꿈꾸게 하였습니다.
귀환한 콤롬버스는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기까지 합니다.
히스파니올라(1차 항해) 남겨두었던 40명의 약탈과 강간에 화가 난 원주민들은 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그 후 2차 대항해(17척, 1500명, 이사벨라 시 건설)와 3차 항해(1498~1500), 4차 항해(1502~1504, 파나마지협 발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탐험가이자 타고난 장사꾼이었는데 원주민들이 살던 땅들은 에스파냐인들에게 분할하고 노예제도를 만들었으며 인디언들에게는 공납과 부역(경작, 금채굴)을 시켰고, 채굴 양이 예상보다 적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거나 노예화 하였다.

그리고 타이노 족 5백명을 단 4척의 배에 실어 유럽에 판매하기 위해 배안에 층층이 눕혀 최대한 많이 실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반가움으로 그들에게 터전과 삶의 방식을 선물로 제공해주었던 원주민들이었지만, 콤롬버스와 그의 부하들이 가했던 잔혹한 행위들과 그 후 여러 차례의 원정들로 인해 에스퍄냐인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면죄부를 받고 오는 항해자들 중 범죄자이거나 용병인 경우가 많아 다른 유럽들의 신대륙 항해보다도 더욱 잔인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2차 항해 부터 서서히 몰락했고 식민지 개척자들의 반란으로 본국에서는 문책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4차 항해에는 왕실이 지원한 작은 배 4척으로 마지막 항해가 시작되었고 동참하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그의 귀환에도 왕은 만나주지도 않았고 그가 죽은 장례식에도 왕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 후 많은 서구 열강의 관심과 항해가 시작되었으나 콜롬버스는 함께 했던 선원, 귀족, 이사벨라 여왕 등 모두에게 버림받게 되었고 그가 가진 특권 또한 자손에게 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조 : 네이버지식백과(두산백과)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네이버 지식백과(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지구는 둥글다, 서쪽으로 가자

그는 '죽어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하였기에 그의 관은 4명의 동상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붕 떠서 받들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콜럼버스와 부하들은 금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수족을 자르고 도망가는 인디언은 사냥의 방식으로 죽였으며 유럽의 전염병은 인디언의 삶을 파괴시켰습니다.
타이노 원주민은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었고 신대륙 발견 이후 60년만에 수백명만 남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처음 지지를 했던 왕실도 그를 외면할 수 밖에 없는 무덤을 스스로 판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페루>

가장 잔혹하기로 알려진 서강의 식민지화는 바로 에스파냐(스페인)일 듯 싶다.
당시 신대륙에서 탈취한 금들의 인기로 '신대륙에는 개 밥그릇도 금으로 사용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많은 배가 본국에서 출발하였고 이 중 빌보아는 스페인 용병들을 거느리고 1511년 '페루' 근처에 도착하게 된다.
그동안의 공포의 대상인 에스파냐인에 대한 소문(금이 없다고 하면 잔혹하게 죽인다)으로 도착한 지역의 원주민 추장은 '여기에는 금이 없고 서쪽으로 가면 금이 철보다 싼 곳이 나온다'라는 말을 전했다.
빌보아는 그 쪽이 어디냐고 묻자 손가락을 가리키며 당시 원주민 언어로 '삐루'라고 답하게 된다.
이것은 '저 쪽'이라는 원주민들의 일상 언어였는데 마을의 이름으로 안 빌보아는 금을 찾기 위해 떠났다.
우연의 일치로 빌보아 밑에 있던 용병 피사로가 발견한 곳이 잉카제국이었다.
단 250명의 숫자로 그들을 정복하기에는 무리이기에 환영 인사를 위해 한 곳에 모이게 하고는 대포로 위협하고 왕을 납치하고는 이를 이용하여 금을 바치게 하고는 보복이 두려워 왕을 죽인다. 그 후 '피사로'는 페루의 리마라는 곳에 수도로 정하고 여기서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미국과 인디언, 1622~1890>

인디언들을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그리워하는데는 그들의 강인한 생활 방식 또한 본받을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땅의 인디언들은 한 순간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과학 기술이 발달된 수많은 나라들과 교전을 치루게 된다.
1> 인디언과의 교전국
잉글랜드 왕국(1607-1707), 네델란드 공화국(1614-1663), 대영제국(1707-1783), 프랑스 왕국(-1763), 스페인(-1812), 텍사스 공화국(1836-1846), 미국(1783-1924), 아메리카 연합국(1861-1865), 캐나다(1867-1924)
2> 인디언의 학살의 시작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황금채집으로 시작한 학살은 인디언들의 생활권을 빼앗고 기아, 역병에 시달리게 하였다. 많은 수의 인디언을 물리치기 위해서 유럽의 전염병(흑사병)을 일부러 전파했고 이에 면역이 없는 인디언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1637년 피쿼트 전쟁
영국 교역상 한 무리가 몰살당하자 적대관계인 모히칸족을 이용하여 피퀴트족을 섬멸하였다. 이 때 부터 청교도들이 대거 정착하게 된다.
-1650년 이로쿼이족이 뉴프랑스의 정착민을 습격한 후 프랑스군대와 약 반세기에 걸친 비버 전쟁이 일어났다.
이 후 인디언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유럽 열강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미국 건립의 미국 성립 이전 조지 워싱턴은 아메리칸 인디언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넓고 싼 땅을 요구하던 백인 정착민과 인디언과의 전쟁이 벌여졌다. 이후 연방 정부가 마련한 '유보지'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인디언은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식민지 백인은 인디언 부족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대리전쟁을 실시하였고 많은 학살이 이루어졌고 마지막으로 '운디드 니 크리그 학살'(1890.12.29.)로 전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이후 인디언 정복과 백인에 동화, 인디언 유보지 강제 이주 등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람들마다 서로의 기록이나 언급이 다르고 적게는 5,000명에서 50만명이라는 숫자를 희생자로 기록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다양한 부락이 공존하던 인디언들은 공동으로 함께 전투에 참여한 사례가 극히 드물었고 여러 각국의 백인들의 일사분란한 전략에 의해 기술적으로 매우 힘든 전투들을 겪어야 했다.

<인디언에 대한 오해>

  1. 계급 사회
    추장에 의한 수상제가 아닌 합의제 민주주의
  2. 토지에 대한 오해
    백인들의 식민화 과정에서 토지는 소유 및 매매의 대상이며 자신의 땅에서 나가달라는 의미였으나 인디언들은 땅에 대한 매매 권리 문화가 없었다

참조: 위키백과, 미국 인디언 전쟁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

이와 같이 인디언의 사회는 미개한 문화가 아니라 매우 민주적이었으며 잠시 빌려쓰는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인디언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허락했으나, 결국 백인들은 끝없는 욕심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후손이 살아가야할 땅마저 빼앗으려는 백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끝없는 전쟁과 그 힘의 차이가 많음을 깨달았으며 결국 가족들과 친구들이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의미없는 전쟁을 멈추었던 것이겠죠.

하지만 마야 문명이나 인디언 문명 또한 그 시대에 있어서 삶의 다른 방식이었을 뿐 절대 뒤쳐지는 문화가 아니었고 오히려 자연과 순화하여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누리려는 그들의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초월주의의 문화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기술의 발달이 사람을 편리하게 하고 강력한 힘을 선물해주었음에도 오히려 이것 때문에 더 많은 경쟁이 생겨났고 상대방의 우위에 서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사람이 가진 우월함이나 돈과 지위를 빼앗기 위해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살은 더욱 높이 쏠수록 더욱 빠르게 떨어진다.

마지막은 표적은 자신일 수 있다"

인디언의 속담은 아니고 한 사진을 보고 생각이 나 끄적여본 문구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세지가 아닐까 싶어서 실력은 미흡하지만 그림으로 남겨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디언들의 삶의 지혜인 속담을 찾아 캘리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인디언들의 삶의 지혜는 우리를 돌아보는 충분히 가치있는 시간이라 여겨집니다.

아마 우리는 그들을 불쌍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물욕주의와 탐욕주의 물들고 늘 정신 없이 추월만 하려는 우리들...
그들은 우리를 보며 불쌍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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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어쩜 이렇게 박식하신지..?^^
하나하나에 의미를 찾으시는 모습에 감탄합니다~
인디언들의 지혜를 배우게 되네요~

원래 인디언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고 안타까워했는데 좀 더 자세히 찾아본 것이죠 ^^
글 쓸 때 잘못 적으면 안될 것 같아서 최대한 올바른 사실을 알려드리려 ~
오아시스님 좋은 한 주 만드셔요 ~ ^^

와 그림 정말 멋져요. 인디언에 대한 역사도 알게되고 유익한 글이네요. 잘 보고 가요 ^^

라나님의 그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건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입니다.
들려주셔서 ~ 감사합니다 ^^

이렇게 유익한 내용을 읽게될줄은 몰랐네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의 사람들을 인디언이라 부른줄만 알았는데 많은 이야기가 있네요.
인디언들은 현대인을 불쌍해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공감이 가요.. 그림이 멋드러집니다^^

인디언들이 많이 동화가 되어가는 부분도 있지만 아직도 그러한 삶을 거부하는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경제적으로나 학력적, 사회적으로 불편하고 안되어 보이지만 본인들은 우리 삶이 더 불편함을 잘 알고 있을 듯 합니다.

자연은 잠시 빌려쓰는 것이라는 인디안들의 마음자세...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와우 엄청 현명한 아가씨입니다 ^^
그러고보면 히바님은 자연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이런 역사를 보면 맘이 답답합니다..왜 정복당하고 죽었어야만하는지..총,균,쇠라는 책을 보고 더 허무했습니다..그러한 역사가 이렇게 조금씩 바로잡혀진다면 좋겠습니당!

네 인디언의 좋은 습관, 문화 등과 함께 잔혹한 정벌과 답답한 수용까지 제대로 알려졌으면 합니다.

제가 알기에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정신문화 수준이 엄청나게 높앗다고 알고 있어요. 미국의 역사를 백인들 중심으로 새로 만들어내면서, 그들의 문화를 저질스럽고 추한 것으로 속여서 기록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벌한 나라들이 잘난 것이 없이 무력으로 학살했거나 괜히 찔리니깐 정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겠죠 ^^

인도 사람들도 인디언으로 불리죠^^
높이 쏠수록 빠르게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 높이로 올라가면 더이상 가속도는 증가 하지 않습니다. 저항 때문에 그렇습니다.~~
ㅋㅋIMG_3328.JPG

(오늘 바다?)
그리고 멈추었다가 내려올 때는 (높은)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고 가속도로 인해 속도는 증가합니다.

가속도는 공기의 저항 때문에 무한정 늘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임랑이요 이제 슬슬 가셔야죠

데꼬가 ~ ^^

긴요한 내용이네요. 내 욕심같아선 그림이 하나쯤 더...혹은 사진이 두어개 더 들어가면 눈이 즐거울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러한 충고 정말 감사합니다 ^^
정벌 과정도 그리고 싶었으나 요즘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초보라서 붓으로 그리고 컴으로 색을 칠하고 수정하는데 시간이... 매일 매일 완성도 높은 멋진 작품 하나씩 그려내시는 분들 대단하십니다.)

참 안타까운 역사네요. 인간의 탐욕이 많은 것을 망친 것 같아 씁쓸합니다.ㅠㅠ
몰랐던 내용을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콜롬버스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네요...;;;;

어쩌면 큰 기대와 오랜 시간의 투자는 사람을 더욱더 탐욕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디언이 합의제 민주주의 였다니..!!!
새로운 사실을 알아갑니다 ...ㅎㅎㅎ

1일 1그림 화이팅입니다!

작가님 르바미술관 규정이 변경되었습니다. 4주 주기로 전시되는 그림 또는 작품이 변경됩니다!

넵넵 ~ 수고 많으십니다 ~
르바님 화이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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