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 Story 1 - 헤이즐넛(Hazelnut) [1]

in kr •  last year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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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훈은 심란했다. 5년 동안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 갑자기 영업부서로 발령이 났다. 사실상의 해고 통보였다. 황부장은 몇 달만 버텨보라며 그를 다독였지만 용훈의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난 뒤였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그 사실이 떠난 마음을 잡아줄 수는 없었다. 갑자기 터진 사고로 회사는 뒤숭숭했고 임원들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용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방을 챙겼다.


오늘따라 지하철 안 공기가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또 왜 이리 많은 것일까.. 열차는 동대문역을 지나 혜화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칠흙 같이 어두운 굴 속을 달리는 열차는 둔중한 진동과 날카로운 금속성 굉음을 냈다. 여기에 철컹철컹 하는 소리가 더해져 들려왔다.

철컹철컹.. 철컹철컹..

이 소리는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지하감옥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럴까? 이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용훈의 가슴은 지하 깊숙이 박히는 철골처럼 어둠 속에 처박히고 있었다. 용훈은 순간 공포를 느꼈다. 잠시 후 혜화역에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리자 용훈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플랫폼에 선 그는 멍하니 서서 빠르게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열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무 생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무감각하게 에스컬레이터에 올랐고 개찰구가 나오길래 기계적으로 지갑을 꺼내 카드를 찍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8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이었다. 그는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가능한 빨리 바깥 바람을 쐬고 싶었다. 숨을 헐떡이며 입구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 ‘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비였다. 빗방울이 세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이 좀 진정되는 듯 했다. 그제서야 그의 시야가 열렸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서울대 병원 뒷골목 안쪽에 있는 한 카페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용훈은 놀랐다. 이 카페가 아직도 있다니… 순간 이곳에서 마시던 따뜻한 헤이즐넛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그라인더에 갓 갈아낸 원두가루가 뜨거운 물에 숨이 죽으며 내뿜는 구수한 향기… 그리고 그의 옆에 항상 있던 그 사람… 이 카페는 용훈에게 추억의 장소였다. 그는 갑자기 뭐에라도 홀린 듯 코트 깃을 세우고 빗속을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을 때 그는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카페는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마침 옛날에 그가 애용했던 자리도 비어 있었다. 그는 냉큼 그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카페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주인장이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흘끔 용훈의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절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단골이셨잖아요.”
“헤이즐넛 한 잔 주세요.”

미소를 띈 채 주문을 받은 주인장은 용훈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용훈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봤지만 그는 어색하게 한 번 웃고는 커피머신 앞 부인에게 주문을 전해주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용훈은 계속 신기한 듯 자리에 앉아 카페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의 앞에는 커다란 머그컵에 따뜻한 헤이즐넛 한 잔이 놓여졌다. 그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치자 잊혀져 있던 옛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 용훈은 항상 그녀와 함께 이 카페에 왔었다. 그는 문득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잘 살고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탁자 위 오래된 낙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용훈 ♡ 서희 1994.5.2”

용훈은 갑자기 눈물을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몹시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가방 안에서 사인펜을 꺼내 그 아래에 이렇게 썼다.

“잘 지내?”

그는 그렇게 추억에 잠겨 있다가 비가 그치자 카페를 나섰다.


이튿날 용훈은 드디어 사직서를 냈다. 황부장은 책상 위 사직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용훈아… 말일까지는 근무한 것으로 해줄 테니까 푹 쉬어..”

용훈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왔다. 그리고 짐을 싸 사무실을 나왔다.


아직 대낮이라 지하철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의 귀에 지하철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다음 역은 혜화… 혜화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문득 그 카페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 설레기 시작한 가슴 속 한 켠에서 야릇한 기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용훈은 다시 혜화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카페를 향해 걸었다. 이제 시간은 많다.


용훈이 카페문을 열었을 때 주인장은 약간은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는 바로 헤이즐넛 한잔을 주문하고는 천천히 들어가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놀랐다. 그가 남겨놓았던 안부인사에 답문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용훈 ♡ 서희 1994.5.2”
“잘 지내?”
“응.. 너두 잘 지내지?”

무려 7년 만에 보는 그녀의 글씨였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 용훈은 그녀의 답문을 보고 또 봤다. 그런 그를 주인장 부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용훈의 머리 속에 주인장 부부가 그녀에 대해 뭔가 실마리를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혹시 서희가 왔다 갔나요?”
“항상 같이 왔던 그 아가씨 말이죠? 한 이틀인가 사흘 전에 왔다 갔어요.”

용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내쳐 물었다.

“혼자였나요?”

주인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 혼자였어요…”

순간 용훈의 얼굴이 어린 아이처럼 환해졌다.

“혼자 와서 바로 그 자리에서 한 두 시간인가 앉아 있다 갔어요.”

지켜보던 주인장 부인이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용훈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자기 폰 번호를 적어 주인장에게 건네주었다.

“혹시 또 오면 전해주시겠습니까?”
“허허… 그래요.”

주인장은 그것을 받아 카운터옆 보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였다. 용훈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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