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달리는 이야기의 허무함 - '7년의 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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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이걸 재미있다고 해야 하는거야? 재미없다고 해야 하는거야?"

나는 웃고 말았다. 그 분이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완성도 자체는 괜찮은 것 같은데.. 이야기도 재미있는 것 같은데 관객의 반응은 떫떠름한 경우가 있다.
이것은 보통 관객이 감정이입할 지점을 찾지 못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영화 '7년의 밤'은 전체적으로 원작의 무게에 눌려 있다.
허긴 그도 그럴 것이 국내작가 중 서사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정유정의 작품이니...
원작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정유정의 문체가 갖는 흡인력과 그녀의 숨막히는 서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원작에서 느끼는 재미를 관객들은 비교적 잘 시각화된 영상을 보고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원작과 영화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주인공의 욕망에서 나온다.
그 욕망이 강렬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크고 강력할수록 이야기는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최현수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다.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는 건데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댐의 수문을 여는 건 또다른 문제다.
이 행위가 댐 아래 사는 주민들 수백 명을 수장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어쩌시겠는가?
아무리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는 것이라 해도 이것은 너무 엄청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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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정유정 작가는 주인공 최현수가 아들에게 갖는 집착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한다.

크고 작은 실패로 도배되어있는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건진 성공작...
삶에 대한 애착도, 미련도 없었던 그가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아들이었다.
최현수에게 아들 서원은 무력감에 짓눌린 사내가 그래도 삶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것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이후 최현수의 행동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건 어렵다.
그것이 표면적인 이해에 그치는 순간 이야기는 실패할 공산이 크다.
작가 정유정이 이 작업에 공을 들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오영제가 아들 서원을 노리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도 최현수에게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쏙 빠져있다.
나처럼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원작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관객들은 감정이입을 할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최현수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쓴다.

'뭐.. 아들이니까...'

그러나 뭔가 강렬하게 와닿는 감정은 느끼지 못한다.
그런 상태로 이야기는 숨가쁘게 진행된다.
지루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뭔가 짜릿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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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원작이 있는 경우 영화가 원작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소설이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첨예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영화보다 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정유정 같은 정상급 필력을 가진 작가의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것을 시각화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그 부분을 아예 놓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정유정은 에필로그에서 이 작품 '7년의 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이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러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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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도 모르고, 원작 소설도 모르고, 영화도 제목도 모르지만,
님의 평론 하나를 읽고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 듯 합니다.
물론 여기 언급되지 않는 수많은 내용들이 있겠지만요.

좋은 평론 감사.
제목 기억하고 싶네요.
7년의 밤. 정유정 작가..

원작 한 번 읽어보세요.
스릴러 좋아하시면 후회 안 하실 거예요.

님의 글을 보고 제목을 기억했는데,
https://steemit.com/kr/@soosoo/link-and-list-33-update-18-04-06-265
의 댓글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읽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평도 읽어 볼 것 같네요..

아 그런가요? 저도 한 번 가서 읽어봐야겠네요.

뭐 원작을 알면 망작까지는 아니다. 라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 요즘 정상적인 것을 볼 수 없는듯 ㅠㅠ

이야기의 힘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어요..ㅜㅜ

스팀아 4월을 멋지게 가보즈아!!!

감사합니다..^^

영화를 만들때 감독은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핵심을 놓처서는 안될 것입니다.

2시간 정도 되는 시간안에 엔딩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 영화라 원작의 모든 것을 담을 순 없겠지만 핵심은 놓치지 말아야죠.

^_^ 보통 소설이나 만화 등은 읽을때 등장인물들을 상상하게 되는데 목소리도 말이죠~ ㅎ 그런데 그걸 영화로 만들어보리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아요.. 온라인 채팅으로만 만나다가 직접 만났는을때 실망하는 경우처럼요~ 원작이 있는데 대박나는 경우는 사람들이 원작을 잘 모를때 인 경우가 더 많은것같아요.. ~

대개 원작을 제대로 못 살리거든요...ㅎ
'7년의 밤'도 원작이 워낙 대단한 작품이라 제대로 살렸으면 꽤 볼 만 한 영화가 됐을텐데 그게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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