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미학 : 위기인가 기회인가?

in #kr8 years ago (edited)

철학을 전공한 적은 없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이글을 읽는 사람들이 어설픈 내 생각을 얼마나 이해해줄까하는 걱정은 된다. 머리속에 뱅뱅 돌던 생각을 어설프게 펼쳐놓아서 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걱정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는 일. 먼가 적어보면 생각도 정리가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글을 올린다.

일전에 오페라는 그리스 비극을 재현하려고 하다가 잘못해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연극 도중에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이 노래로 대사를 한 것으로 잘못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을 재현하려고 하다고 오페라가 생겼다는 것이다. 소위 창조적 오해라는 것이다. 오해속에서 창조적 결과나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다고 인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글과 세계, 즉 텍스트를 모두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동일한 사물을 보고 각자 다르게 이해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서도 어떤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가족과 다른 가족은 사물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다르고 사회도 각각 사물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다르다. 각 국가별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일정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생각하는 인식의 틀과 방식이 일본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동양인과 서양인이 다르다. 사진을 찍으면 동양인은 배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서양인은 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서양화나 동양화를 보면 그런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서양화는 사람을 크게 그리고 동양화는 사람을 작게 그린다. 옛날에나 그런것이 아니다. 사진을 찍어보면 요즘에도 서양사람은 사람을 크게 찍고 동양사람은 작게 찍는다.

일전에 뉴스에서 서양인과 동양인이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서양사람은 자기실현에서 행복을 느끼고 동양인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를 보더라도 이런 기준과는 좀 다르다.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실현이 훨씬 중요한 것 같다. 물론 이런 개별적인 사람별로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구분도 어느정도 타당한 것 같다. 내 주변에서 그런 경향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동양과 서양, 또는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 개인과 개인간에 어떤 인식과 사고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순하게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과 사고의 차이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인식과 사고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잘 정리한 개인은 성공을 했고, 사회는 발전을 했으며, 국가는 번영을 했다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인식의 문제에 관해서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접근을 했다. 하나는 어떻게 인간이 인식을 하게되는가를 밝히는 가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인간과 인간이 각각 어떻게 소통하는가하는 것을 다룬 것이다.

철학의 첫번째 문제는 오랫동안 제일의 주제였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성이 어떻게 작용되는가하는 메카니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데카르트부터 출발한 인식론이 서양철학의 중심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양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인간이 가진 많은 특질 중에서 이성이야 말로 신과 가장 가까운 특질로 생각했다, 이성이야말로 신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신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했다. 신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의 작동과정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하는 문제는 인간이 인식을 어떻게 확대하는가 하는 문제로 발전했다. 철학에서 관념론이니 경험론이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생각을 통해서 인식을 확대한다는 이론과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인식을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이성이 경험과 접목되어 비로소 인식이 확대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칸트 이래 철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지만 사실 이제는 인식론으로서의 철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인식에 관한 문제는 이미 심리학으로 넘어가버렸다. 이제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게되는가는 뇌과학의 영역이지 더 이상 철학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린 것 같다.

두번째 주제인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관한 문제는 대표적으로 현상학에서 다루어진 것 같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는 인간과 인간이 각각 어떻게 동일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이 현상학의 주요 주제였다. 후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문화인류학적 연구과정을 철학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생각을 해보고자 하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과 정반대되는 문제이다. 각각의 인간과 사회 그리고 문화권이 서로 차이가 나는 사고와 인식을 어떻게 소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이 인간과 인간의 인식의 공통점에 주장했다면 나는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공통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개인간의 인식차이와 사회적인 인식차이 그리고 문화적인 인식차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창조적 과정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잘 소하하고 해소는 개체나 집단이 발전을 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인간과 인간의 생각차이 인식의 범위차이가 인식을 확대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의 확대는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인식확대는 선험적 종합판단과 같은 이성과 경험의 착종이 아니라 서로 상이한 인식의 차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나와 다른 생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덧셈이 아닌 승수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승수효효과는 증가한다. 물론 그런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에너지는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에너지가 부족하면 생각과 인식의 차이는 고스란히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상 흥망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에너지의 유무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서로 같은 점이나 공통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점과 차이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위기이자 또 다른 기회이기 때문이다. 굳이 변증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서로 다른 차이가 해소라는 과정을 통해서 전혀다른 창조적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개인이나 사회 국가는 발전한다. 그렇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가 이글을 정리해보고자 한 이유는 한국사회가 유독 서로 질시와 반목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지역적으로 갈라져있다. 그리고 서로 싸운다. 이런 갈등은 잘 해소하고 정리되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해소하지 못하면 위기가 된다.

위기가 아닌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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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네요. 개인이나 사회나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기회가 될듯 합니다. 우리는 때로 부모라는 이유로, 배우자라는 이유로 혹은 같은 조직에 있다는 이유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 위기가 되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나를 제외하고는 생각이 같을수도 없고 같아야 될 이유도 없다는것을 인정하면 그떄부터 대화가 쉽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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