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5

in #kr8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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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창이란 병은 무섭다. 치료도 쉽지 않다. 아버지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우리 마음은 급했지만 병원에서는 대단치 않게 여겼다. 첫 마디가 이거 오래가는 것이고 잘 낫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상태로 집으로 모시고 갈 수는 없는 법이어서 억지로 입원을 하고 치료를 했다. 간호사가 치료가 잘 안된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했다. 아마도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간병인도 알아보았다. 어머니는 간병인 비용에 불만이 많았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병원에 붙어 있겠다고 하셨다. 말린다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동생과 나는 그냥 알았어요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동생과 나는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가 물러서리라고 생각했다.

입원하신지 며칠이 지나니 어머니가 녹초가 되었다. 80노인이 집에서 병원으로 왔다갔다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택시를 타라고 해도 꼭 버스를 고집한다. 평생 어렵게 살면서 생활을 일궈오신 어머니. 어머니의 삶은 처절했다. 어머니는 주민등록증을 만들면서 지문이 나오지 않아서 고생을 하셨다. 하루도 쉬지않고 삯바느질을 하시느라고 손가락 지문이 지워졌던 것이다. 난 중학교 때 어머니의 넉두리를 들으며 아무런 위로도 하지 못했다. 그저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가 택시를 탄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며칠간 병원에 다니시더나 기어코 앓아 누으셨다. 그래서 슬쩍 간병인을 아버지에게 붙였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낮선 여자에게 치부를 내보이려 하지 않으셨다. 하반신이 마비상태였지만 끝까지 화장실을 가겠다고 고집하셨다. 그러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다치기도 하셨다. 간병인은 간병인대로 불만이었다. 대소변을 치우는 것이 자기 일인데 영감이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내가 뭐하나 하는 것이다.

이리 저리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아버지 욕창도 차도가 있었다. 병원은 이틈을 타서 우리에게 퇴원을 강요했다. 더 이상 치료할 필요가 없으니 퇴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집에서 감당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며칠 말미를 얻어서 부지런히 병원을 알아보았다. 요양병원을 정해서 들어갔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달래고 달래서 요양병원으로 갔다. 알음 알음으로 간 요양병원이었지만 그 병원은 치매환자가 많았다. 정신이 올바른 아버지가 있을 곳이 못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더 이상 못 있겠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자고 하셨다. 도데체 정신없는 사람들하고는 같이 지내기 못하겠다는 것이다. 간병인들이 환자들이 치매라고 함부로 한다고 하셨다.

요행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요양병원을 찾았다. 아버지를 모셨다. 환경이 이전 병원보다 깨끗해서인지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아버지는 그날 부터 재활훈련을 하셨다. 열심히 해서 집으로 가겠다고 하시면서. 허리 수술이후 그렇게 하라고 해도 하지 않던 재활훈련을 지금에 와서야 하신다는 것을 보고 난 끌탕을 쳤다. 그전에 했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난 어머니가 아버지보고 답답하다고 하셨던 것을 새삼 느꼈다. 도무지 이런 고집이 어디 있을까. 나도 그런 고집을 타고 났을까.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그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좋은 결과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다. 난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신경성 복통을 달고 사신건지도 모른다.

고집과 소신은 다르다. 현명한자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소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소신이라고 하는 것은 고집에 불과하다. 나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난 아버지 덕분에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것인지 소신을 지키는 것인지를 고민해왔다. 내가 틀렸다 싶으면 그게 어떤 상황이라도 의견을 거두어 들이려 했다. 물론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한동안 잘 적응하시는 듯 했다. 그런데 한달이 조금 지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신 것이다. 병실에 있는 조선족 출신 간병인과 갈등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왔다갔다 할 때 용돈하라며 돈을 조금씩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놈들에게 돈주지 마라고 하셨다. 다른 환자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병실에는 뇌졸증 환자들이 몇명있었다. 후유증으로 인지기능이 떨어졌는데 간병인들이 그들에게 욕하고 때리고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고 한다. 좀 지나면 나으려니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는 간병인을 다섯명이나 쫓아 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머리 아프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최후의 싸움을 하신 것이다. 다섯 명이나 쫒아내고 나니 병원에서 아버지를 다른 병실로 옮겼다. 거기는 여자 간병인이 두사람 있었다. 아버지가 조용해지셨다. 그 사람들은 좋다고 하셨다. 마음이 편해지셨다. 먹는 것도 잘 드셨다. 예전 병실에서는 간병인이 환자들 대변 많이 본다고 먹는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은 참 어려운 곳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음지는 항상 존재한다. 음지 없는 곳이 어디있으랴. 그러나 인간이 음지의 씨앗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암울하기까지 하다.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편해지시니 어머니도 편해지셨고 우리도 편했다. 몇달간 편하게 지내시다가 아버지는 잠을 많이 주무시기 시작했다. 병원을 전전한지가 3년가까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마지막에 편하셨다. 내가 스스로를 유일하게 위안하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에 편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책상은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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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워커 님이 쓰신 글 읽는 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slowwalker nim
글 하나하나에 베어있는 느낌이 절절하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글을 읽는 내내 제 느낌은 그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릴때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웬지 글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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