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회상, 그 해 겨울과 어머니

in #kr8 years ago (edited)


어머니 근황

사람은 아주 어릴때는 기억을 못한다고 한다. 기억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5살인가 6살인가 부터라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때도 대략 그 정도인 듯하다.
그 때는 겨울이었다. 우리는 영선시장 위에 있는 시멘트집에 살고 있었다. 주변이 모두 판잣집이었는데 우리는 시멘트로 만든집에 살았다. 어머니는 거기에서 양장점을 하셨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게가 있고 가게 다음에 방이 있고 그 뒤에 부억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그 동네로 이사를 갔었나 보다. 난 시멘트집에 사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다른 집은 다 판잣집인데 우리집만 시멘트 집이니 무엇인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들 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릴 때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어릴적 기억은 아이들에게 쫒기는 것이었다. 난 동네 아이들에게 쫒기곤 했다. 처음 이사오면 모두들 다 한번씩은 경험하는 텃세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쫒아왔고 무서움에 질린 나는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할 때 난 냇가 한가운데로 첨벙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소리쳤다. 들어와 라고. 당시는 매우 추웠다. 냇가에 들어가 있자면 발이 무척 시려웠다. 조금 있다 나를 쫒아 오던 아이들은 하나씩 흩어졌다. 어떤 아이들은 추우니까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나를 약올리기도 했다. 어찌할 수 없었던 나는 엉엉 울면서 냇가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로 엉엉 목놓아 우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도 울면서 집에 갔다.

어머니는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내가 발이 젖어 들어가면 재봉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양말을 벗기고 연탄난로앞에 앉혀주셨다. 그리고 부엌에 메달려 있는 한꾸러미 양미리 중에서 한 두마리를 꺼내 연탄 난로에 올려 놓고 구웠다. 연탄불에 구은 양미리는 매우 맛있었다. 양미리를 먹으면서 날 쫒아 다니던 그 악동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 때 우리 어머니의 나이는 30을 갓지난 새댁이었다. 난 어머니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동무들에게 쫒기던 서러움을 달래곤 했다.

그집에서 내동생이 태어났다. 내동생이 태어나던날 산파가 집에 있었고 할머니와 여러 사람들이 집에 와서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나보고는 밖에 나가서 놀라고 했다. 밖에 나가 돌아다녀도 딱히 무엇이라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금방 다시 집에 들어갔다. 그러면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구 그렇게 동생이 보고 싶나? 하면서 웃었다.

난 혼자라는 것이 너무 심심해서 어머니에게 강아지라도 낳아라고 채근하고 했던 기억이 난다. 간혹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아직도 하신다.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지나서 방에 들어와도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힘이 하나도 없이 누워서 동생 봤냐고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난 어머니가 아픈 것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동생은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이후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가 고기를 사와서 끓이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고기를 사오셨는데 난 상어고기가 기억난다. 산모에게 상어고기를 먹이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돈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아버지에게 왜 상어고기를 사오셨냐고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그 때일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온동네 돌아 다니면서 내동생이 생겼다고 자랑했다. 조그만 아이가 꼼지락 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너무 자주 울었고 너무 피곤했다. 동생도 실증이 났고 난 친구들과 온동네를 쏘다녔다. 그러다 배가 고프고 힘이 들면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내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어머니는 더 힘들어지셨다. 이전에는 혼자서 일만 하셨는데 이제는 동생을 등에 업고 일을해야 했다. 동생이 울면 젖을 먹여야 했고 어머니는 항상 바빴다. 항상 밤 늦게 까지 삯바느질을 하셨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먹고 사는 것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고 힘드셨다. 간혹 아프다는 말을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5살 철부지에게 아프다고 하실 정도였으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리고 간혹 혼자 저녁 늦게 소리 죽여 우시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럴라 치면 나도 그냥 크게 울었다. 어머니가 우는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고 그럼 어머니도 울음을 멈추고 나를 안아 주셨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삶이 너무 힘들었으리라.

어머니의 삶은 너무 고달펐고 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가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난 사춘기라는 것을 모르고 지났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지난했던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사춘기란 일종의 어린아이 투정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어머니는 세상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어머니는 나이들고 쇠약해지셨다. 귀도 잘 안들리시고 몸도 여기저기 아프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어머니가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키우신 것은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같았으면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으리라. 내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된 것은 모두 어머니의 공덕 때문이었다. 내가 우리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Sort:  

에이씨.. 슬로우워커 님 때문에 눈물났습니다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13
JST 0.027
BTC 61152.47
ETH 2665.18
USDT 1.00
SBD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