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1

in #kr8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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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두번째 기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지나지 않아 방을 정리했다. 아버지 책상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돌았다. 아버지의 삶. 우리에게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 중학교 수학교사였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셨다. 건설업이었다. 사업수완이 없었는지 운이 없었는지 사업은 판판히 실패였다. 집을 멋있게 지어 놓아도 돈을 제대로 못받은 적도 많았다.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업은채 내손을 잡고 돈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예외없이 채무자들은 좋은 집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돈을 내어 놓으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채근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출발할 때 비장했던 어머니의 어깨는 돌아올 때 쯤이면 힘이 빠져 있었고 풀도 죽어 있었다. 난 어머니가 채무자와 다투는 것을 보는 것이 싫었다. 그 어색함은 지금도 기억난다. 동생은 어머니 등뒤에서 고개를 뒤로 꺽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난 그자리를 모면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에게 빨리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돈을 얼마라도 받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지만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들이 주어야 할 돈을 주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판자촌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들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살고 있었다.

연이은 사업실패로 아버지는 집안 식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단 한번도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였기에 굳은 일은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변통을 해서 사업을 벌렸으나 항상 실패했다. 결국은 3어머니가 그 빚을 갚아야 했다. 동네 삵바느질을 해서 안먹고 모은 돈은 모두 아버지의 빚잔치로 끝나기 일 수 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보고 팔자가 편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먹고산다고... 난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표현은 하지 못했으나 난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이면 어며니와의 미묘한 갈등에 몸둘곳을 몰랐다. 우리집에 아버지는 잉여였다.

내가 결혼을 했어도 아버지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문제를 일으켰고 어머니가 해결을 했다. 난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내에게 미안했다. 부잣집 딸이던 아내는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그런 행동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냥 웃으며 지나갔다. 하기야 아버지가 아내에게는 책잡힐 행동은 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가 다 클때까지도 아버지는 소소하게 말썽을 일으키셨다.

시간이 지나서 알았다. 아버지가 철이 없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내면은 정신적 지체와 과거의 가부장적 유산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집안 대소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챙기면서 자식들 학비 한 번 주지 못했다. 난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다 큰 아들놈이 아빠 돈좀 줘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미리미리 용돈을 주어서 내가 아이들로부터 용돈채근을 당할일이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 아빠 용돈주세요 하면 기분이 좋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정신은 분명한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허리수술을 하고 제대로 재활운동을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해도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점차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더니 결국에는 마비되고 말았다. 화장실가는 일도 어려워졌다. 자그마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2년 넘게 집에서 사투를 벌었으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겼다. 욕창으로 심각한 상태가 될때까지 아버지는 상처를 숨기고 있었다. 집에 그대로 있다가는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병원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겨우 설득을 해서 병원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아마 직감을 하셨나보다. 병실 침대에 누워 내가 이제 집에 갈수 있겠냐? 하고 탄식하셨다. 내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실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병원에 다니셨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40대와 50대초반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나와 동생은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긴시간의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병원을 몇번씩 옮기셨다. 간병인을 그냥두지 않았다. 결국은 병원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 병원에서도 아버지는 투쟁을 하셨다. 간병인을 몇명이나 쫒아 내셨다. 우리는 병원에 사정을 했다.

어느날 인가 부터 아버지는 잠을 많이 주무시기 시작했다. 말하면서도 조시고 식사를 하면서도 조셨다. 자꾸 조는 아버지가 이상했다. 어느날 부터인가는 계속 주무셨다. 병원에서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다. 의사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뇌의 미세한 혈관들이 막혀서 그렇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혼수상태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주무시는 것 같았다. 아 이렇게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혼수상태에서도 오랫동안 누워계셨다. 어느날 어머니가 연락을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중환자실에 누운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눈동자를 이리저지 움직이고 계셨다. 난 직감적으로 어버지가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말은 알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말을 했다. 아버지 제말 들리면 눈을 깜짝해보세요. 아버지는 눈을 깜짝했다. 난 놀랐다. 말한마디 못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가 눈을 깜짝했던 것이다. 사람이 죽더라도 청각은 더 오랫동안 살아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왔으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눈을 단지 조금 깜박이는 것만으로 세상에 존재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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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버지에 대해 듣고 유감이다.
슬픈 일 이니

Wow 😳 where did you make this picture?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슬로워커님......^^

감사합니다

본인의 이야기시다면 무척 힘는 유년시절을 겪으셨겠군요.
저는 아버지가 무척 다정다감하셨었지만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허전함이 컸었는데
슬로워커님은 저와는 다른 느낌이셨을 듯 합니다.
다음편의 내용을 기다립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짊어질 만큼 짐읃 주는 것 같습니다 .
남들이 보면 어려울수 있는 것도 정작 본인은 어유로울 때가 있지요

하... 마음을 찌르는 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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