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대한 기억

눈이 마냥 좋은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태고의 기억 때문이다
히말라야 준봉이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것도
그 높이가 아니라 역사로 인한 것
눈은 시간의 선물이다.

시베리아 벌판의 눈은 상념의 무덤
존재는 그 넓이에 의해서 정해진다.
벌판에 쌓인 눈을 보라.
내 머릿속이 하얀 것은 시베리아 벌판이 주는 신의 전언
눈은 세계의 무덤이다.

첫사랑의 설레임은 한송이 눈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떨어진 눈은 곧바로 사라졌고
문득 그녀와의 이별을 예감했다.
감내하지 못하는 사랑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벌판에 내린 눈은 삶의 굴곡을 덮지 않는다.
눈녹은 도시의 풍경이 지저분한 것은 눈 때문이 아니다.
도시의 본성은 원래 추함을 안고 있는 법
눈은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투명한 그림자

눈이 오면 난 즐겨 티베트로 떠난다.
K2 꼭대기의 눈은 거만하게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영원의 모습으로 긴 자락을 드리운
신들의 안식처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은 눈은
자꾸만 사라지려했다.
그녀와 눈은

하얀 첫사랑을 뒤로한 것은
태고의 눈 때문이었다.

눈은 시간과 존재가 짊어진 숙명의 외투
허나 우리 삶에 숙명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