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 '메이저'와 '토모코' 사이에서
-'공각기동대' 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
"기억이 우리를 정의한다고 믿기에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지. 하지만 기억은 우리를 정의하지 않아. 우리를 정의하는 건, 언제나 실천이야"
두 사람이 있다. 대학생인 ‘토모코’와 암살자인 ‘메이저’ 토모코는 납치되어 어느 회사의 생체 실험대상이 된다. 육체도 기억도 제거되고 뇌만 남게 된 토모코는 새로운 기계 육체와 기억을 얻는다. 그렇게 ‘토모코’는 ‘메이저’가 된다. 묻자. ‘토모코’는 ‘메이저’인가? ‘메이저’는 ‘토모코’라 할 수 있을까? 쉽게 답할 수 없다. 과거의 육체와 기억을 잃었지만 한 인간의 정체성인 정신을 구성하는 뇌는 그대로이지 않은가.
뇌만 남은 ‘토모코’는 기계의 몸을 얻는다. 그렇게 ‘토모코’는 살인병기 ‘메이저’가 되었다. 하지만 ‘메이저’는 ‘토모코’를 모른다. ‘메이저’는 새로운(날조된) 기억를 진짜 기억이라 믿으며 산다. 따뜻한 엄마에 대한 기억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던 대학생이었던 기억도 메이저에겐 없다. 메이저를 만든, ‘닥터 오우레’는 메이저에게 진짜 기억을 찾게 해줄 주소를 건넨다. ‘아발론 아파트 1912’ 토모코의 엄마가 사는 집이다.
엄마를 통해 메이저는 토모코를 기억해낸다. 메이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우리가 메이저였다면 “나는 살인병기가 아니야. 밝고 행복했던 대학생이야. 원래의 나로 돌아갈래!” 말하지 않았을까? 나약한 우리는, 현재가 불행하다면 과거의 기억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로 퇴행적으로 돌아가려 한다. 찬란했던 사랑의 기억에 집착하느라 이미 다가온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열정적이었던 직장의 기억에 집착하느라, 이미 다가온 해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의 나’는 자신이 아니며 기억이 규정하는 ‘과거의 나’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메이저는 어땠을까? 메이저는 기억을 찾았지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살인병기로 살아가는, 어쩌면 ‘나’이지 않기 바랐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인다. 메이저는 토모코의 엄마를 꼭 안아주며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지만, 퇴행적으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좋은 싫든 이미 존재하는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누구보다 ‘나’에 대해 혼란스러웠을 메이저는, ‘나’라는 것을 이렇게 규정하며 다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기억이 우리를 정의한다고 믿기에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지. 하지만 기억은 우리를 정의하지 않아. 우리를 정의하는 건, 언제나 실천이야”
영화가 끝나고 나에게 묻는다. '토모코'인 나는 강건하게 '메이저'의 삶을 받아낼 수 있을까? 언제나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 그것에 집착하는 삶을 이어가는 나이지 않았던가. 들뢰즈가 말했듯, 우리는 늘 새로운 주름으로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퇴행적으로 과거에 머무른다. 새로운 주름이 생겼지만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느라 우리는 또 현재를 살지 못한다. 메이저의 마지막 외침이 가슴에 꽂힌다. 기억이 '나'를 정의한다고 믿기에, 기억에 집착하지만 기억은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기억은 과거니까. '나'를 정의하는 건 언제나 지금의 실천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기대’로 유령처럼 부유하는 것들일 뿐이다. 존재하는 건 ‘지금’ 뿐이다. 그래서 우리를 규정하는 건 언제나 ‘지금’의 ‘실천’들이다. 과거의 상처도 영광도, 미래의 희망도 절망도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 집착할 필요 없다. ‘나’를 규정하는 건 ‘지금’의 ‘실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과거의 상처와 영광에서, 미래의 희망과 절망에서 ‘나’를 발견하려할 때, 다시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겠다. “기억이 우리를 정의한다고 믿기에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지. 하지만 기억은 우리를 정의하지 않아. 우리를 정의하는 건, 언제나 실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