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4. Me, too

in #kr8 years ago (edited)

Me, too


5년 전쯤 일이다.


사원 3년차 때 새로 발령난 팀의 팀장이 유독 나를 좋아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딱히 내가 일을 잘했던 것도 아니고)

아무튼 호감 표시를 해주니 나로선 다행이었다.

팀장에게 잘 보였으니 앞으로 편하겠구나, 싶었다.


일개 사원에게 팀장은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권력이었다.  그의 숨소리에도 귀를 세웠다.

어떤 잔심부름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이란 단어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하기 싫은 일은 거절해야 마땅하다는 

그런 종류의 의식이나 자각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분고분함 혹은 굴종함'을 '예의바름'과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팀장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꽤 다정했고 잘 챙겨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팀 회식이 있었는데 팀장이 내 옆자리였다.

나는 팀 막내답게 팀장 수발을 들었다. 빈 잔 채워주고 말 잘 들어주고.

그런데 갑자기 옆 자리에 앉아 있는 팀장이

테이블 아래로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옆을 보니, 팀장은 술에 취해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술에 취해 그런 것이려니, 자기 허벅지인 줄 알고 만진 것이려니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불쾌한 기분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슬쩍 팀장 손을 치우려는데

이번엔 팀장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불쾌했다.

그러면서 취한 목소리로 내게 뭐라 하는데

내 모든 신경은 오직 손깍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데이트 할 때도 잘 안 하는 손깍지를 이 늙다구니 팀장과 하다니.

얼른 깍지를 풀고 싶었지만, 

예민하게 굴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건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깍지일 뿐이야. 

뭐가 어때서. 취해서 그런 건데,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그러는 동안 팀장은 

한참 내 손을 잡고 있었다.


회식이 파할 무렵, 팀장은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팀장을 끝까지 챙기는 것도, 막내의 몫이었다. (막내는 더럽게 할 일이 많다)

어쩐지 기분이 껄끄러웠지만 

제 몸하나 못 가누는 팀장을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겨우 택시를 잡아 팀장의 몸을 던지듯 욱여넣고, 팀장의 집까지 동행했다.

그런데 팀장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집 근처에서 한 잔 더 하고 갈래?"

이것이 바로  라면먹고 갈래? 던가. 순간 극심한 공포를 느꼈지만

나는 또 거절하지 못했다. 팀장과 함께 팀장 집 근처 포차에서 내렸다.

오뎅탕을 앞에 두고 팀장이 또 나에게 뭐라 떠드는데, 

그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발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그것만 빌면서 팀장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다행히 그날 더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 날 출근한 팀장은 전날 일을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그날의 일은 조금씩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아직도 그날의 불쾌한 감촉과 기분은 잊혀지지 않는다.  

권위에 굴종해 거부할 수 없었던 그 굴욕적인 순간이.


최근에 검찰 내부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과 

고은, 이윤택 성추행 사건에 관련된 여러 기사를 접하며

다시 한 번, 내가 겪었던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저 유명한 권력자들이,

알량한 권력으로 약자들을 희롱한 저 쓰레기들이

그들이 자행한 것과 똑같은 일들을 당해보기를

마음 속으로 악마처럼 기도한다.

내가 말 한마디 못한 채 당했던 것 처럼.

아주 기분 나쁘게, 모욕적으로.


참고로 난 남자고

내 허벅지를 만졌던 팀장은 애 딸린 유부녀다.



Sort:  

와 읽으면서 당연히 팀장이 남자겠거니 어휴 썩을 놈 하며 읽었는데..
저도 프레임의 노예였네요..
아무튼 용기내어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악용해 본인의 욕정을 채우는 새끼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정말로요. 나쁜 놈들.

Coin Marketplace

STEEM 0.05
TRX 0.32
JST 0.082
BTC 65824.46
ETH 1792.50
USDT 1.00
SBD 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