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17. 사랑하는 작가가 생겼다 - 독일 소설가, 율리 체

in #kr6 years ago (edited)





중학교 때 시인 이상을 좋아했다.
그의 시가 그렇게 좋았다.
첫 번 째 아해부터 열 세번째 아해까지
도로를 질주하는 <오감도 시제 1호>부터
<이상한 가역반응>에 나오는 난해한 숫자와 기호들까지.
교과서 속 시에 비하면 이상의 시는 혁명이었다.
물론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그래도 좋았다. 몰라도 좋았다.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니까.

(이 무렵 서태지가 솔로 5집을 냈는데
앨범 커버에 오감도 시제 1호가 실리기도 했다.
중학생이었던 난 그게 엄청난 스웩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푹 빠졌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을 때였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가 광고에 나와서
대중의 관심을 약간 받은 정도랄까.
친구의 추천으로 <상실의 시대>를 읽기 전까지
그런 작가가 있는 지도 몰랐다.
다만, 우리나라 소설들을 지배하는 거대 담론이나
6.25 이데올로기 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뿐.

<상실의 시대>를 읽는 순간
마음 속 눈 하나가 번쩍하는 느낌이었다.
소설이 이렇게 사적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개인적인 감정, 허무, 일탈. 그런 것들이 좋았다.
그 이후로 국내에 출간된 하루키의 책은
모조리 찾아서 읽었다. 단편, 장편은 물론 에세이까지.
(하루키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미있다. 이건 주관적인 의견)

요즘은 예전만큼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1Q84>에도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기사단장 죽이기>는 읽다 말았다.
내가 변한 걸까, 하루키가 변한 걸까.
하루키에 대한 내 사랑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끝났다.

그 이후로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없었다.
소설보다 영화를 더 가까이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유롭게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 (핑계 좋다)
학점 관리, 자격증 취득, 토익, 알바...
정말이지 해야할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딴 거 하지 말고 책이나 더 읽을 걸 그랬다.
(알바 빼고. 난 서민의 아들이니까)
학점이나 토익이 취업에 도움됐을 지는 몰라도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왜 이런 건 항상 시간이 흘러서 깨닫는 걸까.

요즘 사회 생활을 한 이후 가장 많은 책을 읽고 있다.
그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이동할 때 틈틈이. 가끔은 시간을 쪼개서.
독서의 재미를 다시금 느끼고 있는 요즘.
참 오랜만에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
독일 소설가 율리 체.
근자에 율리 체의 소설 세 권을 봤는데
하나 같이 재밌었다. 좋았다.

내가 읽은 율리 체의 소설은,

어떤 소송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잠수 한계 시간



국내에 출간된 율리 체의 책은
어린이 동화 하나 빼고 이게 전부인 거 같다.
아직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

프랑스만 해도 기욤 뮈소나 로맹 가리 같은
몇몇 소설가의 이름이 떠오르는데
아무래도 독일 소설가는 생소하다.
<마의 산>을 쓴 토마스 만 정도?
그 <마의 산>도 읽기가 좀 겁난다.
무뚝뚝하고 덩치 큰 독일 남자가 생각난다.
반갑게 인사해도 들은체 만체 할 것 같은.

그러나 율리 체의 소설은 구텐탁하면 친절하게 반긴다.
그러면서 나에게 귓속말로 얘기한다.
'내가 끝내주는 이야기를 준비했거든. 한 번 볼래?'
뭔데 그래? 하고 무심코 봤다가
와와와, 오, 이야를 연발했다.
이런 소설이 있었다니!

율리 체의 소설은 장르적이다.
<어떤 소송>은 SF를 닮았고,
<형사 실프...>는 추리물을 닮았다.
<잠수 한계 시간>은 스릴러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만한 요소들이 많다.
게다가 율리 체의 소설은 은유의 바다다.
좋은 문장이 많아서 밑줄 긋기용 펜을
항상 옆에 두어야 할 정도.

율리 체의 소설엔 사회참여적인 메시지가 있다.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를 다루고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윤리에 대해 질문한다.
그래서 율리 체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를 둘러싼 공동체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역할과 존재에 대해서도.

다만, 법률 등에 대한 전문 지식이 꽤 등장하고
가끔 관념적이거나 철학적인 내용이 서술되기도 한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난독증상이 생길 때가 있는데,
뭐 어쩌랴. 내 지식이 짧아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도 별 탈 없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율리 체의 책이 또 국내에 출간된다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집어들 것 같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는 기분은 퍽 좋다.
낯설고 새로운 만남이라면 더더욱.

마지막으로 내가 읽은 세 권의 소설에
별점과 순위를 매겨볼까 한다.
혹시 관심있다면 참고해주시길.




1위 <어떤 소송> ★★★★★
사회참여적 SF 혹은 SF의 사회참여


2위 <잠수 한계 시간> ★★★★
저 깊은 해저처럼 숨막히는, 지적인 스릴러.


3위 <형사 실프와 평행우주의 시간들> ★★★
우연과 실수가 삶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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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발견! 하고 좋아하게 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작년에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체코 작가를 발견! 하고 너무너무 행복했는데 번역된 책이 얼마 되지 않아 이내 좌절하고 말았어요.
율리 체, 이름이 멋있어서 기억해 뒀다가 읽어 보고 싶네요. 기회 닿는 대로 어떤 소송부터 읽고 싶어요. 지금 쟁여 둔 책이 많아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오 저도 알아요. 그 체코 작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3분의 2쯤 읽다가 어디다 모셔둔 기억이... 저도 다시 흐라발 책을 꺼내들지도 몰라요. 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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