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12. 나의 일상도 시가 될 수 있을까? (영화 패터슨을 보고)

in #kr6 years ago (edited)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패터슨> 포토



7시 30분과 7시 50분.

매일 아침 알람은 꼭 두 번 씩 맞춰놓는다.
한 번의 알람으로는 아침과 싸워 이길 수가 없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아... 아... 아닐 거다.

아침마다 두 개비의 담배를 피운다.
출근 길에 한 번, 출근 후 커피를 마시면서 한 번.
스무살 이후 지금까지의 내 삶은
어쩌면, 나이와 담배 양의 비례 곡선일지도 모른다.

회사 자리에 앉으면, 곧장 이메일을 확인... 하기 전에
네이버에 접속해서 뉴스를 본다.
시사 뉴스 1위 부터 20위 까지 다 보고 나서야
다시 이메일을 확인... 하려다가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들을 클릭한다.
검색어를 20위 까지 일일이 다 클릭해보다가,
아, 맞다. 이메일을 확인...하려다가 카톡을 확인한다.

지인들과 카톡으로 쓸데없고 즐거운 환담을 나눈 뒤,
팀장 자리를 슬쩍 곁눈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정수기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간다.
딱히 목이 마르지 않지만, 그냥, 물을 먹어야 할 것 같으므로.
종이컵에 냉수를 받으려다 말고 믹스커피를 탄다.
믹스커피를 탄 김에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러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생각한다.


퇴근하고 싶다. 퇴근! 퇴근! 퇴근! 퇵! 퇵!



그러나 퇴근 시간은
밀림과 사막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애써 퇴근에 향한 강렬한 욕망을 억누르고
오늘 써야 할 카피들을 확인한다.
(아 네, 저는, 현재 카피라이터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지 위에 카피 몇 글자 쓰다 말고
이메일을, 아니, 연예 뉴스를 확인한다.
고등랩퍼2 하이라이트 클립을 몇 개 보다보면
어느 새 시간은 12시다.


오늘 점심도 순대국, 카레, 육개장, 볶음밥, 아니면 제육을 먹겠지.



오후 일과는 오전의 복사판이다.
차이가 있다면 졸음과의 사투가 추가된다는 것.
2시 혹은 3시 무렵,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 손은 마우스를 쥔 채, 나는 잠시 정지화면이 된다.
루비콘 강을 몇 번 씩이나 건널 뻔한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백지 위에 글자 몇 개를 타이핑한다.
오후의 시간은 느긋한 하류처럼 흐른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카피는 잘 써지지 않는다.


나는 이 대소(大小)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이상의 수필 <권태> 중



언젠가부터 버텨야하는 권태가 된 일상.
입 안 가득 모래알을 문 듯 서걱거리는 시간들.
습기 하나 없는, 스트레이트 문장처럼 건조한 삶.
나는 매마른 일상을 체념하듯 살다가
어느 날, 영화 <패터슨> 속
버스기사이자 시인인 패터슨을 만났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패터슨의 일상.
그러나 그의 일상은 나의 그것과 달리,
매일 조금씩 다른 색채와 리듬을 갖는다.

항상 같은 루트를 도는 패터슨의 버스.
그러나, 버스 안엔 매일 새로운 승객들의 대화가 흐르고
매일 밤 그가 들르는 단골 바에선
밤마다 다른 리듬으로 손님들의 인생과 사랑이 녹아든다.
매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쓰는 패터슨의 시도
그 내용이 매번 조금씩, 조금씩 달라진다.
그렇게 패터슨의 일상은 매일 다른
운율과 리듬으로 변주되며, 근사한 한 편의 시가 된다.

아아, 내 일상도 패터슨처럼 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패터슨과 나의 일상을 비교하다가 생각한다.


영화니까 그래보이는 거지, 뭐. (썩소)



하지만 이렇게 자위해봐도, 여전히
패터슨처럼 살고 싶은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운율 있는 삶, 리듬 있는 삶, 촉촉한 삶.
그래서 시간이 지나 나의 이 시절을
한 편의 시로 기억할 수 있는 삶.

나는 내일도 오늘과 똑같이
두 번의 알람과 두 개비의 담배로 시작하고
이메일과 연예 뉴스 사이를 헤맬 것이며,
마우스를 한 손에 쥔 채 루비콘 강에 발목을 적실 테지.
어제처럼 오늘도 역시 써지지 않는
카피를 만지작 거리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겠지.

그래도 조금은 노력해봐야겠다.
일상을 권태라고 체념할 것이 아니라
그 일상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나만의 운율, 나의 리듬을 발견하기 위해.
패터슨처럼.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내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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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운율과 리듬이 있겠죠.
자신이 만족을 못할 뿐~ㅎ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제 자신의 운율과 리듬은 뭘까 하고 고민을 하게 되네요.^^;

저도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고민을 하게 됐어요. 영화의 힘이란.

천천히 할수있는것을 파악하고 삶에 가치를 주는것을 해보거나 도전해보시길 기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틈틈이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하하하...

글 속에 "시"가 보이네요.
아니 이미 한편의 시를 써 주셨네요.

일상이 늘 단조롭고 매일이 똑같아보이지만
오늘은 결코 어제가 아니고
내일은 또 오늘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

아앗 부끄럽습니다.ㅎㅎ 말씀 감사해요. 더 촉촉하게 살기 위해 노력 해볼려구요. 쉽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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