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이발의 발견

in #kr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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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가을 미국에서 나는 감기에 걸렸고, 급기야 저녁 때 타이레놀을 먹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약기운이 남아서 인지, 다음날 아침 출근 길에 제 때 못내리고 서너역 지나쳐서 깨어났다. 내리고보니, 평화롭기 그지 없는 가을날의 신대륙, 어느 조용한 간이역이었다. 앨리스, 당신은 이제 이곳에 사는가. 기차를 역방향으로 다시 타고 연구실에 오니, 다음과 같은 선배의 이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초현실적인 하루였다.

[이발의 발견]

며칠 전 일이다. 아침에 신문에서 비 올 확률이 분명히 20%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터라 우산을 챙기지 않고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꾸물꾸물한 날씨였지만 집에 갈 때까지 비가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퇴근길에 탄 전철이 지하를 빠져나와 한강다리로 접어들자 전철 창에 사선으로 빗줄기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리는 전철역은 한강다리를 건너자 마자였으므로 점점 굵어지는 비를 맞지 않고 집까지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망연자실해서 전철역 구내에서 나가지 못하고 비를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구내 이발관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발을 할 때가 훨씬 지난지라, 그냥 멍청하게 비 구경을 하고 있느니 이발이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철역에 구내 이발관이 있다는 것은 특이하다면 특이한 일이다. 구내 이발관은 전철선로 밑에 있는 창고 같은 공간이었지만 특별히 다른 이발관과 다르다고 할만한 점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생 이발사 생활을 했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법한 60전후의 노인이 혼자서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이발 의자는 3개가 놓여있었고, 나는 이발사의 권유에 따라 상의를 벗어 옷장에 걸어 놓고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지난밤에 밀린 원고를 쓰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발사는 머리를 어떻게 깎을 것인지 묻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설운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나는 너무 잠에 빠져 나이든 이발사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자꾸 앞뒤로 기우는 나의 머리와 싸우기 시작했다. 비몽사몽간에도 나는 이발사가 가위 통에 꽂혀 있는 세 가지 다른 종류의 가위와 4개의 머리빗을 차례로 사용하면서 내 머리를 다듬고 있으며, 중간 중간 이발용의 굵은 솔을 가지고 머리카락을 털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꿈결처럼 보고 있었다. 머리를 깎는 일을 마치자 마치 군대에서 비 올 때 입는 판초우의 비슷한 것을 두르고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고 나서 이발 의자를 잠깐 뒤로 젖혀 얼굴에 로션을 바른 후 드라이기로 ! 머리를 말렸다.

마침 역무원 복장을 한 중년 사내가 들어와 기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머리를 말리는 것은 내가 직접 하겠노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이 이발사에게는 당연히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으로 보였고, 그것을 방해할 경우 오히려 실례가 될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이발사는 7대 3 가르마를 타서 나의 곱슬머리를 머리통에 붙이느라고 정성을 들였다. 내 모양이 좀 우스웠지만 나 역시 진지한 얼굴로 이발사의 모든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이발이 끝났다. 나는 요금을 묻고 돈을 지불한 후 이발소를 나왔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고, 하늘은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맑게 개어 있었다. 공기는 상쾌했으며, 거리는 깨끗했다. 아침에 들고 나온 워크맨의 플레이 단추를 누르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 예페스가 연주하는 보케리니의 기타 5중주를 들으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왜 이런 하찮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느냐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발을 하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는 것이며, 비온 후 갠 하늘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발소에 푸쉬킨의 시가 적혀있는 석양에 밭을 가는 농부 그림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다면 아쉬운 일이겠지만, 결국 인생이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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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글 직접 쓰신건가요?
넘 잘써서 술술 읽혔네요 ㅎㅎ

저도 글을 쓰기는 하지만 아닙니다..제 글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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