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내무반

in #kr3 years ago

집에 들어오니 아들이 월요일이면 자대배치를 받는다고 아내가 말해 줍니다. 훈련소 나올 때 감기가 들어 있어서 웬 여름감기냐 그랬더니 에어콘을 너무 세게 틀어줘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군대 좋아졌다!"를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는데 그래도 군대는 군대지요 . 고참이 있고 간부가 있고 아무리 분위기가 좋고 시설이 월등해진들 내무반이 있을 터이고 저마다의 군기가 있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정다운 가족, 친구들, 그리고 '싸제'와의 단절만큼 힘든 것도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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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옛 이야기 하나 가져 와 봅니다. 식당 촬영하고 다닐 때 찍었던 흥미로운 곳이었지요. 들어가는 입구부터 가게 안의 모든 것이 손님들을 아스라한 개인사(個人史)의 동굴로 이끌고 갔던, 묘한 분위기의 식당이었지요. 가게 상호는 ‘추억의 내무반’ 분당 어디께에 있었는데 지금도 영업하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가게 입구엔 개점과 폐점 시간을 근무 ‘투입’과 ‘철수’ 시간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빨래줄에 걸린 갈색 군대 수건 (기억나십니까?)에는 메뉴판이 되어 반듯하게 각을 지어 걸려 있었고, 벽장에는 전진,백골,열쇠,청성,오뚜기 등등 대한민국 육군 전투 사단들의 휘장은 물론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군용 물품들이 박물관처럼 늘어섰으며 ‘벙커’라 부르는 지하에 가는 길은 위장 그물이 무성하고, 군용 수통에 물을 담아 손님께 건네는, 글자 그대로 추억의 내무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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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이현민씨는 의장병 출신이었는데 제대한지 10년이 넘었어도 가게에 있던 모형 소총을 익숙하고도 화려한 몸동작으로 돌려 댔습니다. 과거 자기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멋쟁이 군인이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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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 연속 다른 여자들이 면회를 왔었어요. 매주 외출을 나가니까 고참들이 갈구는 거예요. 근데도 맞으면서도 나갔어요.”
아내를 바로 앞에 두고도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떠벌이는 것이 얄밉고 질투(?)가 나 아내에게 카메라를 갖다 댔습니다. “저런 남편을 그냥 두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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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뭐 으히히 나도 다른 남자 면회 갔었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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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주머니들과 종업원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는 가운데 남편 이현민씨만은 찡그리지도 웃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릅니다. “어 당신 그런 얘기 안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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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원래 고깃집이고 그에 수반되는 메뉴가 몇 가지 더 있지만 그 가운데 아주 독특한 메뉴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반합 비빔밥. 7가지 야채를 넣고 계란 후라이, 그리고 고추장을 알맞게 넣고 숟가락으로 약간 비빈 다음 반합 뚜껑을 닫고 요란스레 흔들어 만들지요. 아마 야전 생활을 경험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손수 제조해 본 일이 있으실 겁니다.

반합비빔밥.jpg

“그래 이거야 이거. 야 내가 혹한기 뛸 때......”
“야 천리행군 하다가 찹쌀고추장하고 콩나물만 넣고....”
“내가 이 비빔밥 제조가 주특기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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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군대 얘기가 반합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 뒤섞입니다. 군대 이야기란 남자에게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고는 하지만 촬영하다 보니 왜 여자들이 군대 얘기를 싫어하게 되는 지 이해가 갔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계속되는 군 경험담에 제가 다 질릴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중 한 부부가 얌전히 식사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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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남편이 군대에 가기 전 사귀기 시작해 오랜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결혼 골인에 성공했다는군요. 촬영을 마무리할 즈음, 남편이 술을 건네 와서 염치도 없이 권커니잣커니 하게 됐습니다. 지루할만큼 기나긴 연애 기간과 군 복무의 갭까지 용케 극복하고 결혼한 데 대해 부러움을 표했더니 아내가 싱긋 웃으며 아닌게 아니라 남편이 군 생활할 때 둘 사이엔 가장 큰 위기가 있었다고 얘기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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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군대를 좀 늦게 갔어요. 전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집안에서 결혼 압력도 있고, 맘도 흔들리고..... 헤어질 결심을 굳게 하고 강원도로 갔지요. 주말에 바쁜 직장을 다녀서 면회를 처음 간 거였어요. 징그럽게 깊은 산골에 박혀 있더군요. 맘을 독하게 먹고 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으로 얼굴 보러 온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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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낏 남편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는 듯 소주 한 잔이 스트레이트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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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다 하고 모질게 일어섰어요.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면회실 밖으로 나갔죠. 근데 따라나오는 눈치예요. 그래서 아예 정을 끊어 버리려고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말자 딱 자를 생각을 하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이가 어깨를 치더군요. 여보 그때 기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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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기억도 안나 잘. 그때 당신 말 듣고 정신이 멍해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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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었어요. 웃는다기보다 입을 억지로 벌린 것 같이. 그러고는 이러더군요. '넌 항상 현명한 판단을 했으니까 지금도 그렇겠지. 널 평생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여기까지밖에 안되겠구나'. 그리고는, 경례를 하면서 우렁차게 ‘이기자!’ 그러데요. 뭘 이겨? 이기긴.”

“그거 우리 사단 구호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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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자.png

“홱 돌아서서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들어가는데..... 멀리서 보는데 어깨를 들먹거리더라구요. 버스 타고 올라오면서 네 시간 동안 내내 울었어요. ‘이기자'가 귀에 잉잉거리고 어깨 들먹거리고 우는 뒷모습이 천 번 만 번 떠오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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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이 ‘단칼’일만큼 도도했다는 여자친구와, 그러한 그녀가 이별 선언을 했을 때 끝이구나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일등병의 연분은 그 날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남자친구의 마지막 경례와 흐느적대던 어깨의 악몽(?)에 시달리다 못한 여자친구가 이별 통고를 거둬들인 거지요. 그 결과 그들은 사랑스런 한 커플로 제 앞에서 정다운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랑의 위기를 맞던 날, 일등병의 푸른 옷에 실렸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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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종종 "까짓거 군 생활 더하는 셈 치지!"라고 부르짖습니다. 군 생활은 그렇게 부대를 향해 '오줌도 누기 싫을만큼' 끔찍했지만 동시에 수백만의 남자들로 하여금 한아름씩의 무용담을 간직한 개선 장군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 무용담 속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잠시 반납했던 청춘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겠지요. 그 속에 실려간 아픔과 기쁨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겠지요. 아내와의 모처럼의 데이트를 굳이 '추억의 내무반'으로 정했던 남편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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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방에 들어가 보니 일본 만화 그득, 야시끼리한 일본 만화 속 여자 주인공 수건도 덕지덕지 걸려 있고 24시간 쿵쿵거리던 PC도 얌전히 꺼져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점호 준비하고 있겠군요 . "훈련소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거야."라고 반세기 묵은 군인들의 푸념을 아들 역시 했습니다만, 이왕 간 곳에서 여러 가지 추억도 만들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껌처럼 씹으며 졸음을 쫓기도 하고, 양념처럼 끄집어내 대화의 맛도 살리고, 삼뿌리처럼 씹어삼키며 힘을 낼만한 추억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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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한번은 가도 두번은 가구싶지않은...근데 평생 기억을 할수밖에 없는 곳...^ 어쩌면 나쁜기억들도 추억으로 남는듯합니다^

대한민국 군인들 화이팅입니다

안녕하세요 놀러왔어요^^
제가 군휴가때 부모님과 동생이 복무중인 이기자부대 면회갔다 헌병한테 걸렸던 기억이 ㅠㅠ 제가 운전했걸랑요 ㅋㅋ 휴가때 맛난거 많이 사주세요^^
팔로우하고 갈게요 소통하며 지내요~~^^

제가 아직 @sanha88님과 이웃으로 연결이 안되어 있더라구요.
며칠 전부터 '고집센 콩국수'가 다른 이웃들 블로그에 리스팀되어 제 눈에 띄었답니다.
오늘 찬찬히 읽어보고 이렇게 @sanha88님 블로그까지 왔네요.^^

근데, 이 '추억의 내무반'은 저도 아는 가게 같아서요.
가보진 않았지만, 밖에서 봐도 그 인테리어가 인상깊어서 기억이 납니다.
분당 정자동 푸른마을 옆 주택가에 있는 가게 맞죠?
남편과 저도 그 동네에 추억이 많은데,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