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학자의 숙청

in kr •  2 months ago 

1958년 3월 3일 어느 노학자의 숙청

가끔 부산에 가면 해운대 달맞이 고개 넘어 기장읍을 찾는다. 그곳 기장 시장에는 게를 싸게 파는 식당들이 밀집해 있어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에 게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역으로도 유명한 이 기장은 한국 근대사와 국어연구사와 독립운동사와 현대 북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김두봉이다. (동래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기장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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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좋은 세월을 만났다면 김두봉은 평생을 도서관과 집을 왕복하면서 살아가는 천상 학자였을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에 가지 않고 부친에게 한학을 배우던 그는 홀로 상경하여 고등보통학교까지 학업을 마친다. 젊은 날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한힌샘 주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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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책 한 보따리를 들고 다녀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조선어 사전 <말모이> 편찬에 열정을 쏟았고 그 열정은 젊은 날의 김두봉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시경은 아쉽게도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1914년 병사했다. 김두봉은 스승의 뜻을 이어 1916년 세로쓰기 조선말본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그는 국내에 머물지 못하고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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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도 그의 국어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1922년 ‘깁더 조선말본’을 내놓은 것이다. ‘깁더’란 깁고 더하여 만들어낸다는 뜻이니 이른바 우리가 흔히 쓰는 ‘수정 증보판’이 되겠다. 깁더 조선말본. 얼마나 정답고 머리에 쏙 들어오는 말인가. 훗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고 말았던 이윤재가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기 위해 불원천리 김두봉을 찾은 일도 있었던 만큼 김두봉은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국어학자로 더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노골적인 팽창 정책과 그에 맞선 항쟁의 와중에 그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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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선인민보라는 신문에 역사학자 이청원이 약술한 김두봉의 일대기는 그 간략한 와중에도 그 천신만고의 고행길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두봉씨는 원래 유명한 한글학자로 일찍이 3·1운동 당시에 해외로 망명하여 30년 가까이 해외의 유랑생활 속에서 백절불굴의 굳은 의지로 민족해방 전선에서 시종일관하게 꾸준히 끊임없이 힘있게 싸운 분이다.

한때는 김원봉씨들과 더불어 민족혁명당에서 같이 일하며 민족연합전선의 형성에 대분투하시고 그후 중일전쟁 기간 중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인민의 항일대중운동을 두려워 탄압하기 시작하자 해방구인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랑하는 따님 해엽양을 데리고 도보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한때는 벙어리노릇을 하면서 국민당군 지역을 돌파하여 연안에 들어가 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동지 최창익·한빈·무정씨 등과 더불어 독립동맹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안에서 안한하게 교육사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고 제일선에 나와서 일제의 왜병들과 싸웠던 것이다......” (주간경향 2009.5.19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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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은 군사 조직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의 최고 책임자로서 ‘태항산 호랑이’로서 그 용맹을 떨쳤다. 그 휘하의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대군을 상대하여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었던 호가장 전투에서 그의 벗이자 의열단의 최초 조직자였던 윤세주가 죽었고, <최후의 분대장>의 작가 김학철은 다리를 잃었다. 김두봉은 김구도 이승만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선의 참화를 경험한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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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당시 조선의용군 병력은 수만 명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김두봉은 그 가운데 4개 대대를 이끌고 9월 3일 연안을 출발하여 해방된 조국을 향해 벅찬 발걸음을 옮긴다.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가 12월이었으니 무려 석 달 동안 걸어 걸어 돌아온 조국이었다. 하지만 조선의용대는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요구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김두봉은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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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 그것이 이남에서 단독정부 세력의 득세에 절망한 김구에게 김두봉은 간절한 호소의 대상이 된다. “ 북쪽에서 인형(仁兄- 김두봉)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 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이가 있겠나이까..... 인형께서 수십 년 한 곳에서 공동 분투한 구의(舊義)와 4년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둔 현안 해결의 연대 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최속한 시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남쪽에서는 우리 양인이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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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구는 평양을 다녀온 뒤 암살당했고 그 1년 뒤 북한은 ‘국토완정’을 내세운 전쟁을 시작한다. 김두봉은 이 전쟁에 반대했다고 하지만, 그는 이미 ‘태항산 호랑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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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1958년 3월 3일. 제1차 조선로동당 대표자대회에서 그는 이른바 ‘8월 종파 사건’ (1956년 8월 30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소련파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건) 관련자로서 숙청당한다. 그의 동료였던 무정, 한빈 등과 함께였다. ‘연안파’의 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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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조국에서 수십년만에 본격적으로 본업인 연구에 나서 조선어 맞춤법을 완성하기도 했던 그는 고령을 이유로 사형은 면했지만 오지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다. “내 조카는 죽었지만 약산 김원봉은 영원한 내 조카 사위”라고 자랑했던 후배이자 동지 김원봉처럼. 그리고 1957년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평생의 동지 최창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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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일성 정권이나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나 일종의 블랙홀과 같았다. 참 많은 인걸들이 그 자장에 저항하다가 산산이 부서지거나 사라져 갔다. 1958년 3월 3일 종파분자를 처단하라 부르짖는 무수한 팔뚝질 앞에서 김두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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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을 듣지 않는 지도자가 장악한 나라에 미래가 없다는 걸 북한도 오래전부터 보여주고 있었군요. 3공화국 시절에 경제가 발전했다지만,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북한도 한때 우리나라보다 잘 살던 시절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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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결국 민주주의가 밥먹여 주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