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힘내세요 정식이 나을게요

in #kr8 years ago

아이들은 아이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어른스럽고 나아가 어른들로 하여금 쥐구멍 수색에 나서게 할 정도로 깜찍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직업상 제 아이 뿐 아니라 수많은 남의 아이들을 접해야 했던 제게는 더더욱 그런 경험이 많지요. 제가 만났던 기특하고도 조숙한(?) 아이들 가운데에서 아주 선연하게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건 <특명 아빠의 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을 당시, 특명 가족을 뽑기 위한 면접 때였습니다. 엄마 아빠의 나이는 마흔을 갓 넘었을까 하는 정도였고, 아이는 둘, 그 중의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로 아직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편의상 정식이로 부르겠습니다.)

특명아빠의도전.jpg

<특명 아빠의 도전>은 오락성이 매우 강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즉, 그 출연자가 얼마나 착한가보다는 이 아빠가 얼마나 속된 말로 ‘골때릴’ 수 있을까, 또 그 가족이 어느 정도의 끼로 얼마나 TV 보는 사람들의 웃음보를 간지럽힐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특명 가족선정의 기준이었지요. 유감스럽게도 정식이네는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남들 앞에선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입니다.”하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아빠에 쑥맥을 겨우 면해 보이는 엄마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적당히 몇 마디 물어 보고 “연락 드릴께요 그럼 면접 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의 의례적인 인사로 마무리하면 되는 수순이었습니다. 그때, 이 눈치를 챈 걸까요. 정식이가 간절한 어조로 말을 걸어 왔습니다. “PD 아저씨, 저....저희 꼬.. 꼭 하게 해 주세요.”

단호하긴 하지만 더듬거리는 말투, 사람 만나는 게 일인 저희로서는 이 아이가 평소의 자기답지 않은 용기를 발휘하여 애써 한 마디 한 마디 내뱉고 있음을 금새 알 수 있었지요.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표정으로 한 작가가 “왜애?”하고 다정하게 물었을 때 아이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천만뜻밖이었습니다.
.
“저는요, 우리 엄마 아빠 결혼시키고 싶어요.”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그래. 애 둘 데리고 <특명 아빠의 도전> 면접 보러 온 아빠와 엄마를 결혼시키다니, 아니 아직까지 혼인 신고를 안하고 산단 얘기인가, 아니면 재혼 가정? 다양한 화살표들이 뇌 속을 종횡무진 오가는 가운데 우리만큼이나 당황한 듯한 정식이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 그게요, 사실 지금 저하고 집사람이 이혼 상태입니다.”

이쯤 되면 뚱딴지 할아버지의 귀신이 통곡할 상황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얼이 빠져 버린 우리 앞에서 정식이 아버지는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정식이가 지금은 좀 괜찮지만 백혈병 환자였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도 의사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정식이 아버지의 느릿한 말투를 자르고 들어온 것은 정식이의 쩌렁쩌렁한 음성이었습니다.

“우리 아빠 엄마는요......제 치료비 대시려고요 이혼하셨어요. 나라 법이 그렇대요. 엄마 아빠가 이혼해야 불쌍한 사람으로 돼서 제 치료비가 무료가 된대요. 그래서 엄마 아빠는..... 저 때문에 이혼하셨어요. 우리 엄마 아빠 서로 너무너무 사랑하세요. 근데 저 때문에.... 법원 가서 이혼했어요.”

.
정식이는 약간 울먹이면서도 또렷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정은 이랬습니다. 아이의 백혈병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부모는 위장 이혼을 거쳐, 엄마가 생활수급자가 됨으로써 그나마 아이의 병에 손을 쓸 수가 있었던 겁니다. 부모가 자기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이는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울부짖었다지요. 그때 정식이 나이 만 다섯 살이었답니다.
.
“이혼은 했지만요..... 저희 부부 한 번도 떨어져 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함께 살아요. 그냥 아이를 위해서......” 혹여나 그들의 불가피했던 선택의 흠집이 아이가 소망하는 방송 출연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아버지는 애타게 변명(?)했습니다. 갑자기 퍼부어진 충격적인 이야기들에 얼어붙어 버린 저희 앞에서 정식이는 그 야무진 입을 또 열었습니다.

.

“저 아빠 엄마 결혼시키려고 병 다 나았어요. 이것도 제가 신청했어요. 아빠 엄마 기쁘게 해 드리려고요. 열심히 응원할 거예요.”

.
더 있다간 작가들부터 눈물보가 터질 참이라 면접을 서둘러 끝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온 제게 정식이가 저를 보면서 또 그 앙증맞은 입을 열었습니다.
.
“저 응원가도 준비했어요. 아빠 힘내세요. 정식이 (병) 나을께요. 아빠 힘내세요, 정식이 (병) 나을께요.......”
.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이지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제게 정식이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노래 지금 여기 오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에요. BC 카드 광고에서 이 노래 들은 다음에 계속 부르더라구요.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애가 정말로 아빠 엄마 결혼시키려고 낫는 것 같다고. 기적이라고....... 지금은 거의 괜찮아졌어요.”

그 가족을 보낸 후 저희 팀 내부에서는 일대 논란이 일었습니다. 조금 결격 사유가 있긴 하지만 사연이 좋다, 해 보자는 의견과 이 프로그램은 불우이웃돕기 프로그램이 아니다, 냉정을 찾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결국 어느 작가의 나지막한 말 한 마디가 그 판막음을 했지요.

“저 아빠가 만에 하나 실패했을 때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아빠도 아빠지만, 난 그 아이한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시험에 들게 하기 싫어요. 안 그래도 목숨 걸고 도전하고 있는 아이한테.....”

그 며칠 후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받은 작가가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모르기에 눈여겨봤더니 정식이의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아이의 실망이 크더냐고 걱정스레 물었을 때 작가는 뜻밖에도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더군요. “신청 포기한대요. 자기는 아빠한테 힘을 주려고 신청한 건데 알고 보니까 아빠가 자기 때문에 더 고생할 것 같다는데요? 짜식, 끝까지 기특하네. 그러고는..... 아빠를 어디 내보내는 게 아니라 자기가 얼른 건강하게 커서 퀴즈 골든벨에 나가서 1등을 할 거래요.”

기특한 녀석이라는 감탄을 되풀이하다보니 무엇이 그 아이를 그리 기특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기특한 아이의 깜찍함에 가려져 있던 그 부모였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을 수 있는 방송 출연을 애써 청하며 굳은살 박힌 손을 모으던 아빠, 파출부 일 하다 와서 옷이 이 모양이라고 부끄러워 고개 숙이던, 말주변이 없어 예 아니오로만 일관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 할께요." 한 마디는 단호하게 다짐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던 겁니다.

정식이를 둘러싼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충만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아이이고 아빠와 엄마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몰랐더라면, 아마 다섯 살 난 아이가 “엄마 아빠가 이혼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어 버리겠다”고 울부짖는 애처로움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엄마 아빠를 결혼시키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병마와 싸웠던 투지도 그만큼 단단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요. 지금 옆에서 이 글을 흘낏 본 동료가 기지개를 펴면서 이런 말을 던져 옵니다. “심청이가 그냥 나왔나? 심봉사가 젖동냥하고 길렀으니까 나왔지.”

정식이네 가족에게 특명 도전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 무척 아쉬워집니다. 아니 제가 그 기회를 잡지 않았던 것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서로를 위해 가슴 아픈 최선을 다했던 가족, 그래서 크나큰 비극을 흐뭇한 오늘로 바꿀 수 있었던 가족, 그리고 말 한 마디 표정 하나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울렸을 한 아이와 함께 뒹굴며 웃고 우는 경험이란 PD로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온한 주말,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아이가 아빠 힘내세요를 부르는 걸 보면서 옛 기억과 포스팅이 떠올랐습니다.
방송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낯선 PD 앞에서 선보이던 정식이의 율동과 목소리가 새벽 종소리처럼 제 머리 속을 울려 댑니다. 아빠 힘 내세요 정식이 나을게요. 아빠 힘 내세요 정식이 나을게요.

Sort:  

아이가 참 어른스럽네요. 이제는 어른이 되었을텐데 다들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ᆞ네 감사합니다

너무 감동이라 리스팀해요. 저도 저 프로그램 아주 어렴풋이 제목은 기억이 나요... 정식이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방송에선 볼 수 없는 곳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참 행복한 가정인데 앞으로 더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면 좋겠네요

네 저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5살만 되도 엄마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되는군요ㅜㅜ
아마 방송에 내보내지 않으신건 옳은 결정이라 생각됩니다. 이후 정식군의 씩씩한 결정도 한층 더 감동스럽네요.
지금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그러기를 빌어 주시니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bramd 님 리스팀 보고 @sanha88 님 글 읽게되었습니다.
글이 주는 울림이 크네요.
다른 글들도 읽고싶어 팔로우 하고 갑니다!

(정식이 화이팅! 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화이팅..... 감사합니다.

부자들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가족끼리 정이 더 많은 거 같아요.
정식이란 아이도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나 봐요.
건강하게 잘 자랐을 거 같고 아마도 부모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효자가 되어 있을 거 같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그렇게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아마 지금쯤 군인 아저씨나 복하생쯤?

아이의 마음씀씀이가 참 대견하네요. 아마 지금도 부모님을 잘 챙기는 효자로 열심히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기를 기대합니다 ^^

눈물날뻔했네요...

아..산하님 글 가끔 자꾸 눈물샘 터지게 만드셔서 이거참....

만5세 바께 안되서 억울하게 죽은 관우를 도와주십시요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3
JST 0.080
BTC 61920.54
ETH 1620.69
USDT 1.00
SBD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