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수의 친구

in #kr6 years ago

무기수의 친구

지난 10월 28일은 교정의 날이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밤 1시, 혹여 누가 볼세라(?!) 숨죽여 방송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교정의 날 특집 ‘특별면회’. 쉽게 말해서‘교도소판 TV는 사랑을 싣고'였습니다. 즉 이런저런 죄로 교도소 담장 안에 갇힌 이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과의 ‘특별면회’를 주선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골자였습니다.

“왜 그런 범죄자들을 방송에 내보내느냐?”면서 흥분하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회의에 빠졌으니까요. 하지만 빨간 딱지의 사형수가 아닌 한, 그들 대부분은 그때가 언제이든 사회로 돌아올 사람들이며 그들에 대한 거부감조차 결국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프로그램 제작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수용자들이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죠. 그러나......

한때 같은 조직에서 밥을 먹었던 한 친구는 살인범이 됐고 또 한 친구는 목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그 길 잃은 옛 친구양(羊)을 철저하게 외면하시더군요. 나중에는 저희의 전화조차 피할 정도로 말입니다. 불우했던 학창 시절, 유일하게 따스한 정을 주었던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한 한 수용자의 소망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모 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모범수로 인정, 형기를 감형받아 만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이를 취재차 만났습니다. 그가 만나기를 원한 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친구였지요.

“제가 지방에서 올라왔을 때 유일하게 제게 정을 준 친구였습니다. 같이 공부 좀 하자고 붙들고 늘어지기도 했고 언젠가는 제가 껄렁하게 입고 있으니까 옷을 사 와서는 갈아 입으라고 조르기도 했어요. 제가 학교 안나가면 저를 찾아내서 막 뭐라 그러기도 하고......”
“그런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요?”
“예 안납니다. 그때는 걔가 귀찮았거든요. 그 뒤로 15년이라...... 제가 3학년 3반이었던 건 기억나고 그 친구가 부반장인가 그랬어요.”

악전고투 끝에 우리는 그 친구를 찾아 냈습니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있더군요. 어렵게 그를 찾아내기는 했으나 우리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돌볼 의무가 있는 목사님도 펄쩍 뛰며 십리 밖으로 도망가는 판에 평범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는 30대 생활인이 자기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무기징역수의 급작스런 호출에 응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감옥 속의 친구를 부인했습니다.

“도통 기억이 안나요. 그 사람이 나를 안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는 안타깝게도 무기수 친구를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기억 못하는 체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기억 안난다는데야 어쩔 도리가 있습니까. 답답해진 작가가 과거 그 친구의 선행을 구체적으로 들이대었을 때 그는 엉뚱한 대답을 해 왔지요.

"친구라면 당연히 그 정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특별한 일인가?"

알고보니 그 친구는 무기수에게만 특별한 친절을 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삐딱한 친구들의 탈선에 유달리 맘 아파하고 오지랖이 희한할만큼 넓었던 한 맘씨 좋은 친구는, 나이 열여덟에 하늘이 노할 중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와 15년을 보낸 이의 얼음장같은 인생에서 유일무이한 온기로 맺혀 있게 된 겁니다.

끝내 기억을 더듬어 내지 못한 그를 뒤로 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날,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저기요.... 이름이 강**라고 했나요? 조금 기억이 나요. 우리 집만큼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 아이라 정이 갔던 아이 같아요."

수화기 저편의 친구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그 기억을 쥐어짰던 것 같았지요. 어렴풋이 기억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를 만나 주지 않겠는가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을 해 왔습니다.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우리는 으레 얼굴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를 요청하는 줄 알고 선수를 쳤습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지만 그의 대답은 천만 뜻밖이었습니다.

"그런 건 괜찮고요. 제 얼굴 다 나가도 되구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이 있게 해 주시면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

이름을 듣고 머리를 쥐어짜도 얼굴의 윤곽조차 그릴 수 없는 감방의 친구(?)를 위해서 수화기 저편의 친구는 간절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살인 무기수의 친구로 즉 이로울 것 하나 없는 배역으로 무대에 서는 것 따위는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불량기 넘치는 친구의 옷자락을 붙들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호소하던 15년 전의 중학생으로 돌아가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죄를 짓고 가장 비참한 어둠에 갇혀 살아가는 친구가 쑥스럽게 내민 손을 잡아 주려고 애쓰고 있었던 겁니다.

두 사람의 기억의 양이 충분치 못한 탓으로 아이템에서 제외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우리들 사이에서 '천사'라 불린 친구는 전화를 몇 번 걸어 왔습니다. 혹시 자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냐고......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만 해 달라고...... 그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저는 자발없이 치솟아 오르는 뜨거움을 내리누르느라 애써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일점 일획의 이득도, 혜택도 없는 일을, 어쩌면 으스스한 살인 전과자와 쉽게 가르지 못할 인연을 쌓아야 할 그 자리를 그토록 간절한 어조로 바랄 수 있다니........

대중의 정서상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이들을 다룬 프로그램이었기에 완성된 뒤에도 '특별면회'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편성과 취소, 재편성의 우여곡절을 거친 후 겨우 전파를 타던 날, 저는 방송의 주인공이 된 다른 수용자들을 지켜보면서 저는 목소리로만 기억되는 '천사'를 떠올렸습니다.

무기수 친구가 복역 중인 교도소를 물었다니 어쩌면 그는 제 시간과 돈을 들여 해당 교도소까지 찾아가서 그들만의 '특별면회'를 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잔인한 세월이 지워버린 그들의 과거를 재구성했는지도 모르구요. 천사 친구라 하더라도 살인범 친구의 죄를 용서할 자격은 물론 없겠지요. 하지만 그 죄를 감싸안을 권리는 있을 겁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행사하기 어려운 권리 말입니다.

포기하고 있었던 방송이 끝끝내 전파를 타던 밤, 저는 목사도 스승도 포기했던 권리를 과감하게 행사했던 어떤 서른 초반의 천사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스스로도 불행했고 남을 지극히 불행하게 만들었던 죄많은 영혼을 새로운 친구로 거두게 되었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죄값을 치르고 만기 출옥을 앞두고 있던 전(前) 무기수의 앞길에 그의 천사 친구가 뿌린 온기가 한껏 머금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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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찾아서 보겠습니다 ...

아 아마 다시보기 어려우실 겁니다.... 딱 한 번 나간 프로그램이고..... 이미 15년 전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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