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의 아리랑 개봉

in #kr5 years ago

1926년 10월 1일 영화 아리랑 개봉

1926년 10월 1일 일제에 의해 헐리울대로 헐리우고 좁아질 대로 좁아지고 망가질대로 망가진 궁궐 앞을 거대한 건축물이 섰고 그 낙성식이 거행된다. “동양 최대의 석조건물”이라는 조선 총독부였다.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자형 평면에 지상 4층, 총건평 9,600여 평,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조선의 지배자가 일본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적 존재였다. 내부 장식도 초호화판으로 꾸며졌고 후일 독립 한국의 중앙청으로 수십 년 동안 쓰인 뒤 철거될 때까지도 별 하자가 없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경복궁은 일본인 관리들의 휴식처로 전락한다. 경회루 일대의 잔디밭은 골프연습장으로 둔갑하기도 했고 격무에 지친(?) 총독부 관리들의 연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날, 종로 단성사에서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것이다. 전날 영화 전단지에 ‘불온한 내용’이 있다 하여 몽땅 압수된 사건의 여파였을까. 영화 <아리랑>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개봉 초반보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은 더욱 늘어났고 기마경찰이 출동해서 군중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극장 문짝이 부서져 나가고 유리창들이 깨져 나가기도 했다.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으면서 북치고 장구치고 창까지 다 한 영화였다. 내용은 어느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여동생을 탐내는 부잣집 마름, 그리고 광인의 친구 등이 엮어 내는 사연이었다. 광인 청년은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마름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고개를 넘어가는데 그때 마을 주민들이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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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회령 사람으로 독립군에 가담하기도 했고 더 큰 부대로 찾아가다가 “학생들은 총 들고 싸울 게 아니라 공부로 애국하시오.”라는 독립군의 충고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던 나운규는 이 영화로 남과 북 모두를 통틀어 ‘한국 (조선) 영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항일 영화’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지만 영화 곳곳에 조선 사람들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장치들이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변사가 “경성에서 철학공부를 하다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라고 유장하게 읊을 때 7년 전에 있었던 기미년 독립만세의 굉음이 관객들 귓가에 어찌 내려앉지 않았을 것이며, 사람을 죽인 뒤 실성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라는 말을 남긴 뒤 순사에게 끌려갈 때 보는 사람 눈시울에 어찌 습기가 끼지 않았을 것인가. 나운규 자신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한편에는 자랑할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까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나운규, 한길사) - 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 삼천리 (1930.7)

이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 <아리랑>은 사실 남과 북 모두가 부르고 스포츠 단일팀이 구성되면 국가로 채택되기도 했던 노래 ‘아리랑’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실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민요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제가격으로 창조된 노래였다. 물론 없는 아리랑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운규의 회고다. “내가 지었습니다. 나는 국경 회령이 고향으로 내가 어린 소학교 때에 청진에서 회령까지 철도를 놓기 시작했는데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 들을 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즉 나운규는 영화 뿐 아니라 그 후 남과 북의 민중들이 흥얼거렸던 아리랑의 곡조까지도 남겨 준 셈이다. (물론 이게 일본풍이니 뭐니 하는 시빗거리는 좀 있는 것 같지만)

조선 총독부가 우렁차게 들어서서 조선은 일본 땅임을 다시 한 번 살천스레 과시하던 날, 조선인들의 거리 종로통에서 한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은 영화사적인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 후로도 끈덕지게 살아남은 노래 아리랑이 구슬프게 태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일본 고관들이 조선 친일파들과 경성 시민들을 늘어세우고 대일본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팡파르 속에서 일제 시대가 낳은 우리 민족의 명화와 명곡이 태어났다는 것은. 하지만 아쉬운 것은 조선 총독부 건물은 수십 년 동안 남아 있었음에도 그토록 남북 모두 기념비적이라고 평가하는 <아리랑> 필름은 ‘삼천리 강토’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음이다. 왜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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