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량의 9월 22일

in #kr8 years ago

1937년 9월 22일 중국 제 2차 국공합작 선언

중국 대륙이 비록 거대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문물을 갖춘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이긴 했지만 누대에 걸쳐 그 땅은 자주 만만했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의 ‘오랑캐’들이 힘만 갖추면 넘보고 군침을 흘리는 땅이었고 그를 물리쳐 자존심을 지킨 적도 많았으나 허무하게 그 드넓은 땅과 새카만 인구를 이민족에게 헌납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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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오랑캐’는 일본이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대륙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은 1928년 만주 군벌 장작림을 폭살했고 뒤이어 1931년 9월 18일 압록강을 넘어 군대를 진격시킨다.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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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당시 만주 군벌의 수장이자 죽은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은 베이징에 신병 치료차 와 있었다. 공산당 토벌에 행여 지장을 줄까 장개석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자 했고, 장학량에게 휘하의 동북군 주력을 중국 본토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자신의 본거지가 일장기에 뒤덮이는 꼴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장학량은 장개석의 명령을 따라 20만 대군을 만리장성 이남으로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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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고향이 사라져 버린 장학량 부대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그 한을 달랬다. “내 고향은 아름다운 송화강 유역. 수풀과 산과 탄광이 있고 산과 들에서 수수와 콩이 자랐다네. 내 고향은 만주 송화강변. 늙으신 부모님도 그곳에 계시다네......하지만 9.18 9.18 그 비참했던 날 이후 나는 고향을 떠나왔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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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가 된 동북군은 고향을 뺏은 도둑놈 아닌 중국말 쓰는 동포를 토벌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먼저 국내를 안정시키고 외세에 저항한다,”는 것이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의 기본 입장이었다. 일본이 발등의 종기라면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은 심장의 혹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대장정 끝에 연안에 웅크리고 있던 공산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동원한 부대가 바로 장학량의 부대였던 것이다. 송화강의 붉은 수수밭을 그리고 있던 동북군 부대원들은 신명이 날 수가 없었고 흥이 오를 리가 없었다. 그것은 장학량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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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거리는 그의 엉덩이를 차 주기 위해 장개석이 비행기를 타고 서안까지 날아왔을 때,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병간(兵諫), 즉 ‘군사를 동원하여 설득하는 일’을 단행한다. 쉽게 말해 총을 들이대고 장개석을 포로로 삼아버리고자 한 것이다. 장학량의 병사들이 총통의 숙소를 기습했을 때 눈치 하나는 빨랐던 장개석은 잠옷 차림으로 창문을 넘어 산 속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이내 병사들은 총통을 포위했고 장개석은 자신을 쏘라고 대들지만 장학량은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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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쏘지 않습니다. 왜 우리를 항일 전선으로 이끌지 않으십니까." 이윽고 장개석은 동북군의 진중에 연금된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사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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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은 일체의 내전 중지, 손문의 유지 준수, 민중애국운동 개방 등 8개 요구사항을 전국에 전하고 장개석에게도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하지만 약간 비아냥의 의미로 붙여진 별명이긴 하나, ‘중국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웠던 장개석의 고집도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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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에서는 주은래가 부랴부랴 달려오고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서안으로 날아왔다. 장개석 주은래 송미령 장학량.... 중국 현대사를 종횡으로 내달린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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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인까지 가세한 설득 앞에 장개석은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할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는 공식 서명이 이뤄지지 않은, 장개석의 인격을 담보로 한 구두 약속이었고 물론 대중에 공개되지도 않는다. 장개석은 “약속은 지킨다.”고 선언하고 돌아간다. 이때 장학량은 믿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군법회의를 자진해서 받겠노라며 장개석과 동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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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대군의 수장이요 장개석의 목숨을 수중에 쥐었던 사람이었다. 장개석을 죽여 버리고 전면 항일 전선으로 나서자는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장학량은 알고 있었다. 장개석을 죽인다면 항일이고 무엇이고 바닥으로부터 와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장개석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장개석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을. 자신이 장개석과 동행하지 않고 남아 있거나 연안의 중국 공산당에게로 가는 것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약속을 어길 핑계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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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으로 가는 도중 장개석은 “서안으로 돌아가라. 남경 사람들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지만 장학량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법적 응징을 받아야 한다면서 끝끝내 장개석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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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중독자에 천하의 바람둥이로 이름이 높았고 만주에 쳐들어온 일본군에 저항하지 않아 ‘부저항장군’이라는 오명을 가졌던 장학량은 이 위대한 행동을 통해 중국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우뚝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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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 전쟁이 본격적으로 터지자, 서안의 ‘병간’이래 꾸준히 협상을 진행해 온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1937년 9월 22일 오늘, 거국적인 항일전선을 다짐하는 제 2차 국공합작을 함께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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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은 10년의 금고형을 받지만 장개석에 의해 사면된다. 하지만 장개석은 그 이후 한 순간도 장학량을 자유롭게 놓아 둔 적이 없었다. 공산군에게 밀려 대만 해협을 건널 때에도 장개석은 장학량을 챙겨서 끌고 갔고 그 당대는 물론 아들 장경국 총통이 죽을 때까지 저택에 연금되어 있었다. 그 중의 어느 해 장개석의 생일에 장학량은 시계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 나를 놔 달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장개석은 답례의 선물로 낚싯대를 보냈다고 한다. “포기하고 낚시나 하고 살아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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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은 2001년 101살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만주 땅을 밟지 못한 채 죽었다. 서른 대여섯의 팔팔한 나이로부터 아흔 살까지 새장 안의 새로 살아야 했던 그였으나, 자신의 욕망과 미래 모두를 내던져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중국의 단결(불완전하나마)을 이끌어 냈다. 국공합작을 위해 장학량은 반 세기가 넘는 여생을 버려야 했다. 그 기나긴 기간 동안 후회에 젖은 날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고향 만주를 일본군이 덮쳤던 9월 18일, 그리고 그 나흘 뒤인 9월 22일을 맞이할 때마다 그 후회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9월은 너무나 특별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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