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풍 81 시작

in #kr8 years ago

1981년 5월 28일 국풍 81

5공의 실세에는 세 명의 허씨가 있었다. 육사 17기 허삼수와 허화평. 그리고 후일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난세를 치세로 바꾼 영웅”이라고 묘사하여 파문을 일으켰던 허문도.

이 허문도는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고 일본 특파원도 역임했던 중견 언론인이었다. 1940년생이니 1980년이래봐야 나이 마흔 하나였던 허문도는 역사에 남을 대단한 기획 작품으로 자신의 출신지인 언론을 짓뭉개 놓는다. 그것이 언론 통폐합이었다. 그야말로 정권의 결정에 따라 수십 년 역사의 방송이 문을 닫고 신문사가 없어졌다. 지금과 위상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삼성그룹도 TBC를 빼앗겼고 동아일보는 동아방송을 잃었다. 1도 1지, 한 도에는 한 신문만 있게 했고 그 와중에 꼬장꼬장한 기자들은 하루 아침에 쫓겨나 술 취한 채 악을 쓰며 거리를 헤매야 했다. 이에 대해서도 허문도는 언론 통폐합이 자기의 소신이라고 우겼다. “언론과 재벌분리, 방송 공영화, 사이비 기자 정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
이 허문도는 그래도 다른 군바리들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었다. 빈약한 정통성을 지닌 정권은 대개 색다르고 거창한 이벤트를 기획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서 자신의 구린 데를 감추고자 하기 마련이다. 그 이벤트(?)는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의 경우처럼 월드컵일 때도 있고 멕시코처럼 올림픽일 때도 있었으며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깡패 소탕 및 참회 퍼레이드일 수도 있다. “나는 깡패입니다.” 플래카드 들게 하고 군인들이 여차하면 쏠 기세로 좌우를 옹위하던. 광주의 피바람을 휘몰고 권좌를 차지한 5공화국 정권의 실세로서 허문도 역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다잡고 광주의 피비린내를 지울만한 거대한 행사를 기획했다.
.

그가 주목한 것은 그가 없애버린 민영방송 TBC의 한 행사였다. 197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나는 괜찮아.”하며 쓰러지기 두 달 전 TBC는 제 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연 바 있었는데, 허문도는 이 소박한 규모의 프로그램을 엄청나게 뻥튀기함과 동시에 제 5공화국 헌법에 새로이 삽입된 '민족 문화 창달' 조항에 부응하는 어마어마한 관제 축제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그 이름도 고풍스러운 국풍 81이었다.

국풍.jpg

허문도가 이 행사를 위해 얼마나 목을 매달았는지는 그의 포섭(?) 대상을 보면 안다. 그는 80년 12월 석방된 김지하를 찾아 전라도 해남까지 찾아간다 “문화적 리더쉽을 발휘해 달라.” 그때는 정신이 명징했던 김지하는 당연히 이 청을 거부한다. “반파쇼 운동 전선 전체를 휘어잡아서 자기와 같이 ‘사쿠라 놀음’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도 의지의 한국인 허문도는 그치지 않고 ‘아침이슬’의 김민기, 70년대초부터 불기 시작한 탈춤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채희완, 소리꾼 임진택에게까지도 접근한다. “공개적으로 놀 수 있는 마당을 열어 주겠다.” 그러나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놀테면 너 혼자 놀아라”는 식이었다. 허문도는 마침내 혼자 놀 준비를 했다.

,

하늘을 나는 로케트도 떨어뜨리는 세도가의 기획이었다. 자그마치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하는 가운데 "'새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의 힘이다"라는 가슴 벅찬 슬로건을 내건 국풍 81은 1981년 5월 28일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198개 대학의 수천 명의 학생들과 그만큼의 일반인들이 행사에 참여하여 벌이는 온갖 민속놀이와 흐드러진 술판으로 온 여의도가 흥청거렸고 정권은 통행금지를 일시 해제하는 파격까지 베풀어 주었다. 그래도 허문도는 아쉬웠다, '민족 문화 창달'의 취지에 걸맞는 대학생 탈춤반들의 참여가 전무했던 것이다.

.

섭외는 물론 해 보았지만 정권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는 국풍 81에 참여하겠다는 탈춤반은 역시 없었다. 또 의지의 사나이 허문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탈춤반 졸업생이나 군대에 있던 사람들까지 총동원하여 '서울대 탈춤반'을 급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그 의지가 가려함을 넘어 가상하다 싶을 정도다. 그러나 국풍 81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행사였다. 허문도와 전두환의 친필 서명이 담긴 문서에는 국풍 81을 띄워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학원문제의 부분해소’, ‘학원문제를 국풍으로 유도, 축제 속에 매몰’, ‘학원의 고질적 국면 타개’, ‘문제서클을 차단 고립 소수화’, ‘민속서클을 체제 속으로 흡수’, ‘반체제적인 대학사회의 전통문화붐을 체제화’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기획이었지만.

.이용3.jpg

역사란 아무리 암울한 사막같은 현실 속에서도 돌연변이같은 꽃을 피우게 마련이다. 이 국풍 81에서 한 명의 슈퍼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국풍 81에서 민족 문화 창달을 위한 차전놀이나 풍물이나 고싸움 등등보다 월등 인기를 누린 것은 역시 대학생들의 가요제였다. 여기서 서울예전에 다니던 이용은 <바람이려오>라는 곡으로 누가 봐도 압도적인 가창력을 선보인다.

누구나 대상은 이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대상은 서울대 그룹사운드에게로 돌아갔다. 정권의 실세께서 기획하신 행사 수상자의 '네임밸류' 도 고려해야 하는 정치적 이유로, 이용이 타야 할 상이 엉뚱한 곳으로 갔는 설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용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본격 가수로 데뷔하여 한국 가요계를 평정하게 되는데 그를 한국 가요계 꼭대기에 올려 놓은 노래가 바로 지금도 10월 하순이면 항상 흘러 나오는 명곡 <잊혀진 계절>이었던 것이다.

허문도가 그 좋은 머리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돈 처바르고 언론사 동원하여 띄웠던 국풍 81은 결국 가수 이용의 탄생으로만 기억되는 ‘잊혀진 행사'가 되고 말았다. 그 국풍이 1981년 5월 28일 시작됐다.

Sort:  

10살... 여의도에 불꽃 놀이 보러 갔다가 가족과 헤어지고 목동에 있는 집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날 뉴스에 인파에 깔려 죽은 분도 있었고... 버스 타고 왔던 기억을 되살려 집까지 걸어갔던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했지만, 집에 와보니 식구들은 별 걱정도 없이 수박을 먹고 있었던...
국풍81은 그정도 기억밖에 안나는군요.

방송에 자막 많이 나왔죠. 오지 말고 TV로 보라고.....

어렸을 때 신길동에 살아서 아버지 손잡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서 아버지는 옷이 다 찢어지고 저는 아버지 손을 놓칠까봐 거의 두려움에 떨며 걸어서 집까지 겨우 온 기억.

대학에 가서야 이 행사가 그런 의도로 기획된 축제임을 알았죠.

이용은 얼마 후에 스캔들이 빵 터지면서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던가요?

뭐 지금도 10월의 마지막날 시즌에는 전국 밤무대에서 가장 바쁜 가수로..... ㅋㅋ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88
BTC 59609.55
ETH 1570.16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