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번외편 조지훈과 김난희

in #kr4 years ago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번외편 - 조지훈과 김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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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연애되는 순간 그 자체가 정점(頂點)이다. '황금시대는 황금시대가 오기 바로 직전에 있다'는 말이 있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는 노랫가락도 있지만, 이 두 마디 말이야말로 연애 미학에 있어서도 그대로 하나의 공리(公理)가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운 마음이 싹터서 꽃피는 순간까지가 그 황금시대요 절정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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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결합의 선(線)이니, 결혼하여 부부애, 육친애로 변성하는 길, 다시 말하면 '변성적인 사랑의 코스'요, 다른 하나는 결별의 선이니, 떨어져서 서로 사모하며 영원히 맺어지지 않는 연인애(戀人愛)로 환원하는 길, 바꿔 말하면 '슬픈 사랑의 코스'가 그것이다. 슬픈 사랑의 코스에는 겉으로는 결합하면서 실상은 영원히 떠나는 방향으로 정사(情死)라는 것이 있고, 변성되는 사랑의 코스에는 벌어지면서도 만나는 길을 막지 않는 우정으로의 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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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연애 감정으로는 최고 경지지만, 형태미(形態美)로는 변상적(變常的)인 것이고 장난사랑은 겉보기는 연애 같지만 내용미로는 천박한 것이다. 풋사랑은 앳되고 울고 싶은 것이 좋고, 청신하고 서정적이어서 좋다. '늙은 사랑'은 구수하고 슴슴한 것이 좋고, 소박하고 관조적(觀照的)인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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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보시니 어떻습니까? 언뜻 보면 연애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다년간의 경험을 거친 이가 줄줄 써내려간 것 같지만 ‘달콤쌉싸름하고 아기자기하고 몽글몽글한 연애담과는 걸맞지 않은 문투와 무뚝뚝한 단어들에 혀가 덜컥거리다 보면 연애에 대해 젬병인 사람이 잔뜩 어깨에 힘만 주고 써내린 느낌도 듭니다. 이 ‘연애에 대한 소고’(?)를 쓴 이는 대관절 누굴까요? 힌트를 드리면 유명한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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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더 힌트를 드리자면 청록파 시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도 긴가민가하신다면 이 구절을 읽어 드리죠. ‘얇은 사 히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맞히시는 분은 없겠죠 네 시인 조지훈입니다. 그분이 쓴 <연애미학 서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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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듯 쓰셨지만 이분은 그렇게 화려한 연애를 못해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 스무살에 결혼한 아내와 해로한 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그와 청록파 동인이었던 박목월의 자유분방함과는 사뭇 결이 다른 진짜 ‘선비’셨거든요.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 일화 몇 가지를 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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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이 옥사했습니다. “만주의 호랑이”라고 불리운 맹렬 독립운동가였지만 일제의 독기가 극에 달하던 시절, 그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김동삼의 영구를 인수해 장례를 치른 게 만해 한용운이었지요. 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지었던 집 심우장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 조지훈은 험악한 일경의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아버지와 함께 찾아가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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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배운 한학과 조선어학회 일을 하면서 익힌 넓고 깊은 조선어 이해, 일제 때 붓을 꺾고 은둔했던 절에서 접한 불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와 경험과 학문을 몸에 둘렀던 그의 시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그의 깊고도 넓은 문학 세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이 책에서 할 얘기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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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서슬 퍼런 선비의 포스도 함께 뿜어냈던 사람입니다 . 언젠가 가톨릭의 노기남 대주교와 얘기를 나누면서 노 대주교가 “인간은 담뱃불만 스쳐도 그걸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하자 조지훈이 “(살을 지지는) 인두가 식었다 더 달궈서 가져와라.”고 했던 성삼문의 예를 들어 반박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주교가 시큰둥하자 조지훈은 성냥 대여섯개에 불을 붙여 손등에 올려 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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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냥이 타오르고 제풀에 꺼지기까지 조지훈은 태연자약했고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이키기까지 했다니 그 결기를 능히 짐작케 합니다. 또 전쟁 중 조지훈은 공군 종군 작가단에 가입하여 전선을 누비며 군인들을 위무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문인들이 음주 후 노래를 하는 걸 보고 한 격노한 군인이 권총을 들고 난입했습니다. “전우들이 죽어가는데 무슨 음주가무를 하고 자빠졌느냐?” 는 얘기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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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戰時)의 총 든 군인만큼 두려운 존재가 없죠. 공포(空砲)까지 쏘아댔다고 하니 술과 노래에 흐는히 젖어들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음장이 됐을 겁니다. 그때 나선 것이 조지훈이었습니다. 조지훈은 권총 든 군인의 뺨을 후려치며 외칩니다. “총으로만 애국하는 줄 아느냐?” 기세 좋게 공포탄 쏘아대며 문인들을 위압하던 군인은 허리 깊숙이 사과를 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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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지조론>을 통해 곡학아세하고 권력에 빌붙는 행태를 거침없이 비판했고 정권과는 이승만 정권이든 그 뒤의 박정희 정권이든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그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딱 한 마디만 가져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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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만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도자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실망하였는가.” 누굴 말하는지 아시겠지요?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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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꼿꼿한 선비는 나이 스물에 독립운동가이자 역시 경북 출신의 꼬장꼬장한 선비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습니다. 본디 이름은 김위남이었는데 이 시인 남편은 그녀에게 ‘난희’라는 이름을 선사하지요. 아내는 남편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 남편을 스승처럼 존경하고 살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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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진

글 쓸 때 애들 떠들면 버럭 호통부터 터지고 몸은 약해서 툭하면 피를 토하고 살았지만, 누가 벽돌로 찍으려 위협해도 (해방 공간에서 좌익학생이 그랬다고 합니다) 전쟁통에 군인이 총을 들이대도 “네 이놈!”이 먼저 나오는 이 꼬장꼬장한 양반이랑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며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존경이면 가(可)하겠지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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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3남 1녀를 남겨 둔 채 나이 마흔 여덟에 훌쩍 떠나 버렸으니까 아무리 60년대라고 해도 단명하셨습니다. 김난희 여사는 지금껏 (2019년 현재) 생존하셔서 100세를 바라보고 계신데 (1922년생) 말입니다. 김난희 여사는 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세월을 홀로 지새우신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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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부인 김난희 여사는 칠순에 접어들어서 남편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어려서 서예 배우느라 붓을 배웠지만 그 뒤로 거의 손에 든 일조차 없었던 붓을 다시 잡게 된 거지요. 그 시발(始發)은 남편의 시를 글씨로, 서화로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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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 늘 그렇잖아요. 까닭도 없이 마음이 시끄럽고,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수양삼아 쓰기 시작했어요. 나이 들어 조 선생 글 읽어보니 참 좋대요. 젊어서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죽을 때 가까워 그런가, 그 양반 남기고 간 시를 읽으면 모났던 마음이 둥글둥글해져요” (조선일보 2002년 6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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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진

함께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려웠던 남편을 죽은 지 수십 년 뒤에야 재발견하는 한 할머니. 젊어서는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던 호호백발 할머니는 남편의 글을 자신의 붓에 담아 옮기고 그림도 덧붙이면서, 마치 함께 남편과 사진을 찍는 듯 하다며 기뻐하시게 됩니다. 이분의 작품 역시 그저 심심 파적의 취미 수준은 훌쩍 넘어섰고, 오지 중의 오지였으나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 가기가 좀 편해진 경북 영양의 조지훈 문학관에는 김난희 여사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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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그 연애론에 ‘늙은 사랑’은 구수하고 슴슴한 것이 좋다 했는데 남편 초상화 앞의 아내의 웃음은 참으로 구수하고 슴슴해 보였습니다. 오랫 동안 잊었던 자신의 재능을 남편의 시를 쓰면서 다시 발견하고 그를 통해 울퉁불퉁한 마음을 다스리고 동글동글한 마음으로 남편을 추억하는 한 할머니의 모습은 또 얼마나 소박하고 관조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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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리운 마음이 싹터서 꽃피는 순간까지가 그 (사랑의) 황금시대요 절정”이라는 조지훈 시인의 말에는 다소 이의를 제기해 봅니다. 함께 어우러져 서로 마주보며 피어올랐다가 한쪽이 떨어지더라도 그 추억을 거름삼아 다른 한쪽에는 새순이 돋고 새 꽃으로 화사하게 타오를 수 있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요. 사랑의 황금기란 그리 짧은 것 같지 않습니다. 김난희 여사를 보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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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들고 물감을 찍고 백지를 채워 나갔던 순간, 그분은 경북 영주의 무섬마을에서 홍안의 청년 조지훈을 만나던 무섬마을 선성(宣城)김씨 집안 규수 ‘김위남’으로 돌아갔고 남편의 혈육같은 시들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대쪽 같았던 시인의 아내로 살아 내린 반평생을 한 땀 한 획 뜨개질하듯 되짚어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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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무섬마을에 아내를 두고 떠나면서 아내의 시선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했던 <별리>(別離)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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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듯 끊질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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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교히 흐르는 낙동강변 무섬마을 기와집 처마 밑에서 <별리>를 받아들었던 열 여덟 신혼의 아내가 거꾸로 여든 하나쯤 되어 이 시를 다시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그 마음에는 어떤 소리가 울리고 무슨 내음이 돋아나 붓으로 옮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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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궁금해지는 사연도 있습니다. 조지훈 시인의 유작 중에는 <사모>(思慕)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생전에 발표한 그 어떤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1996년 9권짜리 ‘조지훈 전집(나남출판사)’에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시인이 돌아간 뒤 원고를 정리하다가 나온 유작인데 심지어 부인도 이 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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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시인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세상에 드러난 이후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렸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민예원, 2011)에도 조지훈 시인의 대표작 <승무>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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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는 가슴 속 깊이 사랑하였으나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남의 사람’이 돼 버린 대상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결혼 때부터 ‘스승님처럼 모셨던’ 고고한 품성의 시인, 아름다운 언어의 실로 비단같은 시를 짜 냈으나 결코 문약(文弱)하지 않았던 이 지사(志士)적 시인에게도 뭔가 감추고 싶었던 사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별리>를 쓸 때 아내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것처럼 짝사랑에 목을 맸던 주변 친구나 문우(文友)의 사연에 감화돼 남긴 것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더하여 이 시를 읽는 김난희씨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조금 무람없는 호기심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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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김난희 여사는 이 시 역시 진하게 간 먹물 듬뿍 찍어 백지 그득히 채웠을까요? 김난희 여사가 현판을 쓴 조지훈 문학관이나 김난희 여사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꼭 한 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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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해야 할 말이 있음이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잊혀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있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줄 오선을 그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 버린 너를 위해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이미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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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기쁨 아니면 슬픔’이다. 이 단순명료한 말이 왜 이렇게 웅장하고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헤집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워지도록’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부디 많은 사랑 나누고 그 속에서 기쁨과 슬픔 두루 걸치시기를.

이 조지훈 김난희 편도 실리지 못했습니다 ^^ 다른 역사 속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 보시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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