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 그리그 가냘픈 희망

in #kr6 years ago

1937년 12월 13일 난징 대학살과 그 주변 사람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대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보지만 어떤 이는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으로 잡기도 한다. 즉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전된 것이 태평양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허섭쓰레기로 봤고 “3개월 내에 중국 전역을 석권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중국군은 예상 외의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만도 석 달을 넘게 잡아먹는다. 장개석의 정예군이 투입됐고 백척간두에 선 중국군도 기대 이상의 전력을 발휘했던 때문이다.

전투가 치열했다는 것은 희생자가 많았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예상 외의 상처를 입은 맹수는 포악해지기 마련이다. 일본군은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었다. 안시성을 점령하면 성내의 모든 사람을 도살하겠다던 당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수도 난징이었다.

장개석은 수도를 충칭으로 옮긴다고 선언했지만 뜻밖에도 결기를 발휘한 것이 남경지구 중국군 사령관 당생지였다. 정부는 떠났지만 자신은 남아 난징을 사수하겠다고 기염을 토한 것이다. 죽어도 서울을 사수한다고 부르짖던 6.25때 한국군 수뇌부처럼. 피난을 가는 난징 시민들과 결사항전 소식에 난징만이 안전하다고 믿고 들어오는 피난민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일본군은 점점 다가왔다.

이때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 몇몇은 긴급히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중립지대를 조성했다. 그 주역 중의 한 사람이 욘 라베. 지멘스 사 직원이면서 나찌당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사유지까지 내놓으며 전쟁판의 안전 지대를 만들기 위해 분주했다. 난징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결사 항전을 외치던 중국군은 의외로 쉽게 무너졌다.

가장 결기를 세우던 사령관 당생지 자신이 난징 함락 하루 전 줄행랑을 쳐 버렸다. 그만 믿고 있던 수십만의 난징 시민들을 일본군의 벌어진 아가리 사이에 남겨 둔 채로. 심지어 일부 중국군은 자신들의 퇴로를 피난민들로부터 확보하기 위해 남징성문을 잠가 버리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굶주린 악어는 그 입을 쩍 벌린 채 성큼성큼 난징에 입성했다.

그런데 원래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마쓰이 이와네는 당시의 일본군 장성 치고는 신중한 인물이었다. “외국의 수도에 발을 디디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약탈을 금하고 외국인들의 권리를 존중하라. 방화를 저지른 병사는 처벌하고 군대와 헌병이 함께 진주하여 불법 행위를 엄단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병이 나서 후방으로 물러가고 그를 일본 황족 출신의 장군 아사카 요스히코가 대리하게 되는데 여기서 사단이 난다. 아사카의 이름으로 봉인된 명령서에 “다 죽여라”는 학살령이 떨어진 것이다.

일본군은 지나칠이만큼 명령에 충실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중국인들을 죽였다. 두 장교가 일본도로 목 베기 시합을 했다는 보도는 그 참상을 그대로 드러내 주거니와 (그들은 전후 사형당한다) 난징 대학살의 사진 기록에는 옛날 야만 시대에나 나왔음직한 사지절단, 임산부 살해 후 태아 적출, 인체에 대한 총검술 테스트 등 별의 별 일이 다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와중에 ‘중립지대’를 설치했던 외국인들. 특히 욘 라베는 죽을 힘을 다해 그 만행으로부터 중국인들을 살려 내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의 유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찌 깃발이었다. “나는 일본의 동맹국 독일 나찌 당원이며 이것은 그 깃발이다. 일본군은 우리의 영역을 지켜 주기 바란다.” 심지어 중국 정부에 연락해 중국군 패잔병을 빼내기도 했으며 중국에서 30 여년간 살면서 벌어들인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돕는다.

“저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함부로 배반할 수 없었습니다. 또 그렇게 신뢰받는 존재가 되는 건 매우 감동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목숨을 구한 중국인의 수는 약 20만 명으로 헤아려진다. 나찌 당원으로서 히틀러 총통에게 이 참상을 호소(?)하며 이를 막아 달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던 이 우직한 독일인은 결국 일본군에게 추방당하는데 그가 난징을 떠날 때 살아남는 난징 시민 수천명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다. “당신은 살아있는 부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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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 당원이었기에 그는 전후 체포됐고 자신이 나찌와 같이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법정 투쟁을 벌이다가 알거지가 되고 병석에 눕는다. 그때 난징 시민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내전으로 험악해진 정세 속에서도 돈을 모아 그에게 전달한다. 아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요베 역시 그 힘겨운 정성에 눈물을 흘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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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 수뇌부는 처벌을 받는다. 그 최고 책임자로 지목받은 이는 병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마쓰이 이와네였다. 12월 17일 난징대학살이 마무리된 뒤에야 입성한 그는 학살의 자취에 경악하며 “우리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음을 알았다. 승리를 기뻐할 수 없다.”고 토로했고 휘하 장교들을 격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난징 대학살의 책임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은 그는 죽기 직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쌓았던 공이 부하들의 짐승같은 행위로 무너지고 말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모두들 나를 비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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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가장 책임이 막중한 일본군 황족 아사카는 “황족은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묵계 속에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편안히 살다가 죽는다. 길게도 산다. 나이 아흔 한 살.

난징 대학살 얘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분개하고 일본인의 잔인성을 성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직도 난징 대학살을 20세기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우기며 그 실체를 마주하기조차 거부하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함에는 벼락도 모자란다. 그러나 그 13년 뒤 1950년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남한 전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학살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를 능가하는 희생을 낳았다. 난징대학살은 그나마 기념되고 기억되며 그 와중에 피어난 인간애를 기리며 라베의 비석도 난징에 옮겨졌지만 우리의 흑역사는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가도 진상은 커녕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사연으로 남고 “빨갱이들의 거짓말” 정도로 매도되기 일쑤다. 과연 우리는 일본인보다 온유한가. 우리에게 아사카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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