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같은 인간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in #kr6 years ago

송곳같은 인간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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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가, 다스리는 자와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나뉜 이래 양자 간에 갈등이 없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야. 역사 속에서 어질고 현명한 통치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불만을 표출했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지배자들에게 맞서기도 했어. 국사나 세계사 교과서에 수도 없이 적혀 있는 ‘000의 난’이 바로 그것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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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이란 것이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고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아. 반드시 누군가 먼저 부당한 상황을 깨치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내가 앞설 테니 따르시오’라고 외쳐야 해. 난이 끝나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른바 ‘주동자’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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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청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할까 싶지만 인류 역사의 기이한 점은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로웠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버리고 마는 송곳 같은 인간”(웹툰 <송곳> 중에서)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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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앞바다의 많은 섬 가운데 암태도라는 곳이 있어. 목포에서 25㎞ 정도 떨어져 있는데, 토지가 비옥해서 인구가 한때 1만명을 넘었다는 큰 섬이야. 일제강점기에 한때 “사람다운 사람은 다 암태에 산다”라는 말이 돌 만큼, 이 섬 주민들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해준 적이 있었다. 암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일컬어진 유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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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24년에 진행된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야. 암태도에도 지주들은 어김없이 있었고 대표적인 이는 문재철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암태도에만 약 140정보(1정보=3000평)의 농지를 보유했고 저 멀리 강원도 철원과 충청도 당진에도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어. 문재철은 농민들이 생산한 소출의 70~80%를 소작료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암태 사람들은 참아야 했지. 왜? 지주 어른이 무서우니까. 혹시 눈 밖에 나서 그나마 부쳐 먹던 땅을 빼앗기면, 오도 가도 못하고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암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송곳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서태석이라는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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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은 20대의 이른 나이에 8년 동안이나 암태면장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에 열성이던 여느 ‘면서기’가 아니었어. 1920년 3·1운동 1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으니까. 1년 동안의 옥살이를 한 뒤 돌아온 고향은 그에게 또 다른 저항의 마당이 된다. 지주와 마름(지주의 앞잡이이자 하수인을 이르는 말이야)의 횡포가 도저히 참아줄 수 없을 만큼 심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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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은 자기 소유의 땅이 있던 자작농이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보다 못한 처지인, 지주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들을 위해 선봉에 나서게 된단다. “소작료는 4할(40%)로! 소작료 쌀 운반비는 지주가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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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은 1924년 3월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를 연다. 지주와 정면으로 맞서게 된 거지. “분쟁이 생기면 소작료를 내지 않고 파작해버립시다! 결의를 어기는 사람하고는 모든 것을 끊어버립시다!” 그 와중에 면민들은 지주 문재철 부친의 덕을 기린다는 송덕비를 부숴버려. 이 문제로 소작민과 지주 측 청년들이 충돌하면서, 결국 소작인 13명이 목포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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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온 섬이 들고일어났어. 청년회고 부인회고 할 것 없이 1000명 이상의 섬사람들이 뭍으로 나와 ‘아사동맹’(단식농성)에 들어간 거야. 이때 불렀다는 소작인의 노래.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뼈 빠지게 일하여도 살 수가 없거든,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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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사람들은 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그대로 법정 안에서 또는 법원 앞마당에서 굶어 죽자는 결의를 보였어. 남녀노소가 정말로 밥 한 술 넘기지 않고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공을 이불 삼아” 버텼다. 그 중심에 서태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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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도 혼비백산했다. 암태도 도민들의 의로운 투쟁에 식민지 조선 전국이 들썩였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되는 김병로를 비롯한 시국 사건 전문 변호사들이 다투어 변호를 자청했고 나라 밖에서도 성금이 쏟아졌다. 일이 심상찮다고 생각한 일본 경찰이 부랴부랴 중재에 나서 소작회와 문재철은 다음과 같은 합의에 서명하게 돼. “소작료는 4할로 인하하고, 구속자는 쌍방이 고소를 취하하며, 지주 아버지의 송덕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 암태도 사람들, 즉 ‘사람다운 사람들’의 승리였다. 서태석의 승리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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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태석은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집중적 감시를 받는다. 결국 농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몸과 정신이 다 망가져버려. 정신분열증까지 얻었고 대소변을 동네 꼬마에게 부탁해 내가게 했다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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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광복을 두 해 앞둔 어느 날, 그는 논두렁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소작료 인하를 부르짖으며 소작농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였을까? 벼 포기를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자기 땅을 가진 농민이었지만 남의 땅 부쳐 먹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은 그렇게 슬프게 생을 마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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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아빠랑 동갑내기 정도인 한 아저씨가 고시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분은 창원 롯데백화점에서 시설 관리를 맡았던 용역업체 노동조합의 지회장이었어. 그분은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백화점 앞에서 넉 달 동안 천막을 치고 농성하며 싸웠고 해고자 10명 중 8명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킨다는 합의에 도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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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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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회장의 이름은 복직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을 계속해 조합원들 고통이 계속되는 것보다는 노사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낫다”라면서 다른 사람의 복직을 조건으로 자신은 회사를 떠나기로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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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날카롭게 튀어나와 회사의 두터운 고집에 구멍을 냈던 송곳 같은 지회장 아저씨는 회사를 떠나 막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다가 고시텔 방에서 외롭게 세상을 뜨고 말았단다. 아저씨의 희생으로 직장을 다시 얻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알았을까? 슬퍼해주었을까? 벌써 잊지는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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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또 한 명의 송곳 같은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있다. 어린 시절 첼로를 배우고 음악을 사랑했던 감수성 예민한 소년.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유신에 맞섰고 대학생을 면하기 전에 용접 기사 자격증을 따서 뛰어들었던 사람. 전두환의 살기가 시퍼렇던그 당시 노동운동을 조직했던 사람, 기나긴 수배를 받느라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가질 시간조차 빼앗겼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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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다 피하고 무서워하는 대상 앞에서 가장 용감하고 날카로웠던 사람, 그러면서도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 중의 하나인 유머를 잃지 않았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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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일탈을 괴로웠다기보다는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자신의 동지들을 더 생각했던 한 송곳이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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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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