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아파트 와르르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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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국내 최초의 아파트는 어디인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설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1957년 세워진 종암 아파트를 꼽는다. 이 아파트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꽤 많이 따라붙는데, 우선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고, 처음으로 '아파트-먼트' 즉 '아파트'라 이름붙은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수세식 변기가 최초로 설치되어 집밖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화장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아파트였다. 노구를 이끌고 그 낙성식에 출동한 이승만 대통령은 너무 기뻤던지 약간 민망한 축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이 종암 아파트에 있습네다.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입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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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마포 도화동에 진정한 의미의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1962년 6개동 450 가구의 완성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도화동 아파트단지의 준공식에도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초대됐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근엄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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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파트가 혁명 한국의 상징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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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물론 5.16을 끌어댄 소리였지만 그 축사는 반쯤은 들어맞았다. 실제로 아파트는 이후 한국 주거 문화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이쯤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상기해 보자. 서울 시장 김현옥.
그는 1966년 서울 시장으로 임명됐다. 그 전직이었던 부산 시장 시절부터 그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일단 하기로 마음 먹은 일은 무슨 난관에든 개의치 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로 유명했던 그는 추진력 하나는 A 플러스 제곱의 서울 시장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의 기공 준공식 테이프를 끊었고 그 가위들을 시장실 벽에 걸어 인테리어를 대신했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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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주요 간선도로는 대부분 金시장 재임 때 넓혀졌다. 사직터널을 뚫고 청계고가도로를 놓았다. 남산1.2호 터널과 마포대교도 첫삽을 떴다. 1백44개의 보도육교와 북악스카이웨이,강변도로도 만들었다." (손정목,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1 중)
이 불도저가 또 하나의 창대한 계획을 세웠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하고 서민들에게도 적합한 주거 공간을 제공해 보자는 의도였다. 서울시는 서민들의 입주를 위해 입주금 없이 가구당 20만원씩 15년간 대출해 주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여론은 박수를 보냈고 서울시는 또 여기에 힘입어 건설 가구수를 늘렸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전체 예산은 그대로였고 건물당 건축비는 줄어만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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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된다"의 불도저 정신이야 나무랄 것이 없었지만 한 집을 짓는데 들어갈 비용을 팍팍 줄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괜찮다 정신"과 그런다고 설마 무슨 일이야 일어나랴는 '설마 정신'이 불도저에 탑승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거기에 한국 건설업계의 악랄한 전통 '사바사바 정신'까지 가세하자 사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최악의 비극으로 치닫고 만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 와우산 언덕 배기에 지어진 와우 아파트 역시 그 시민 아파트 중의 하나였다. 역시 이 아파트의 건설비는 평당 1만원이 될까말까한 수준이었고 외부공사는 시가 맡지만 내부는 입주민이 알아서 한다는 이상한 방침도 선보였다. 하다못해 출입 계단 난간도 설치하지 않아 추락사가 빈발했다.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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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자체의 안전은 더 어이가 없었다. 지질 검사를 아예 실시하지도 않고 산중턱의 화강암 암반이니 당연히 견고할 것이라는 지레 진단을 내려 버렸다. 그 뿐 아니라 70도 산비탈의 경사를 버티는 기둥에 들어갈 철근을 70개에서 5개로 줄이는 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설마 무너지기야 하겠어) 시멘트며 철근이며 기준대로 들어간 것은 거의 없는 부실공사에, 참여기업들 역시 대부분 부실기업이었다. 이걸 눈 뜨고 지켜보다가 준공 필증 내 준 공무원들은 당연히 '사바사바' 정신의 구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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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20분. 아파트 입주민들이 단잠에서 채 깨지도 않았을 무렵, 주부들이 눈 비비며 아침 준비에 나섰을 즈음, 갑자기 발 밑에서 천둥같은 소리가 들린다. 불도저 정신으로 6개월 남짓한 기간에 초스피드로 지은 와우 아파트(요즘도 아파트 하나 지으려면 2년은 걸리는데) 가운데 한 동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것이다. 새로운 시민 아파트 시대를 열었다며 자화자찬한지 3개월 만이었다. 아파트 주민 33명이 속절없이 흙과 콘크리트더미 속에서 숨을 거뒀다. 와우 아파트 붕괴 참사였다.
사전 책임 점검에는 서투르지만 사후 책임의 희생양을 양산하는 데에는 좀체 뒤지지 않는 우리의 전통처럼, 마포 일대의 공무원 사회에서는 태풍이 불었다. 마포구청장은 사고 이틀 전에 퇴직했지만 바로 쇠고랑을 찼고 마포구청은 쑥대밭이 됐으며 건설사 경영진부터 현장 책임자까지 구속 태풍이 불었다. 그 가운데 별난 희생양이 하나 있었다. 그는 가수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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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시스터즈 내한 공연 게스트 가수로 나와서 신고산 타령의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불렀다.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 안그래도 '와'자만 나와도 가시 찔린 듯 벌떡 일어서던 정권의 조영남의 치기는 눈에 대못같은 것이었고 그는 바로 체포되었다가 군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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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된다"의 불도저와 그 위에 타고 앉아서 "대한민국에서 안되는 게 어딨냐?"며 제 배불리던 돈 먹는 하마의 공존, "걸리면 죽는다"의 살기 속에서도 "설마 집이 무너지기야 하랴"는 "그까이꺼 대충"이 활개를 치던 시대의 불행한 결실이었다. 얘기하고보니 웬지 쭈뼛거리며 양미간을 모으게 된다. 지금은 안 그런가? 와우아파트는 옛날 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것일까? 글쎄.....